교황권 강화는 교회를 영적으로 개혁하는데 걸림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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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권 강화는 교회를 영적으로 개혁하는데 걸림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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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2.1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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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6세기 초, 종교개혁 이전 교회내의 상
▲ 조병하 교수

신성로마제국을 구성하고 있던 독일의 국가와 교회를 위한 개혁이 1433/34년에 쿠에스의 니콜라우스의 글 ‘보편적 일치에 대하여’를 통해 제안됐다. 그 후 지속적인 복잡한 조정절차를 거쳐 황제의 동의를 얻어 1497년 이후에 “독일제국회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음 해에 제국입법이 이루어졌고,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 진행에 제국의회의 결정은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세워졌던 제국의회 법정은 이제까지 황제의 궁에서 행해졌던 최고법정의 권한을 넘겨받았다. 또한 1500년에는 황제를 의장으로 대부분 선제후들이 중심을 이룬 20명이 대표하는 독일제국정부가 뉘른베르크에 설립됐다.


칼(샤를) 5세는 1519년 독일황제로 선출되기 전 전 독일제국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은 독일에서만 다루고 결정해야한다고 규정된 황제 선거법에 동의해야 했다. 1519년부터 1556년까지 독일의 황제였던 칼 5세는 프랑스의 프란쯔 1세(1515-1547)나 영국의 헨리 8세(1509-1547)와 같은 강력한 중앙권력을 갖지 못했다.


한편 교황의 아비뇽유수 후에 교황권은 약화되고 공의회주의가 교회개혁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으나 다시 교황권 강화의 시도 속에서 공의회주의는 약화되고 1449년 자체적으로 해산을 결정했다. 그리고 교황권의 강화는 교회를 영적으로 개혁하는데 걸림돌이 됐다. 또한 1517년 개최됐던 제5차 라테란회의는 교황의 손에 놓여 있었다.


공의회에서 시도했던 개혁들이 실패한 후 15세기에 고위 성직자들은 점점 더 세상적이고 향락적인 삶을 살았다. 교회는 성직자들의 이윤의 도구가 됐고, 기부금을 받고 사제를 임명하였으며, 그렇게 서품된 사제는 죽은 기부자의 영혼을 위해 침묵미사를 드렸다. 참으로 성직자들 사이의 도덕적인 상태들은 사악했다. 사제의 혼외관계는 너무나 만연되어 있었고 결과로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제의 자녀’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감독직 수행자들과 수도원장들은 귀족의 일원으로 인정됐고, 사제들의 혼외 관계로 태어났던 귀족자제들을 부양하는 일이 이들의 중요한 일이었고, 목회는 불가능했다. 수도원제도는 15세기에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했다. 대중적인 경건은 15세기에 들어서 더욱 활성화 돼 행위의 헌신, 기적을 믿는 신앙, 성지순례, 성인과 성유물숭배, 사면제도 등이 활발히 행해졌다. 16세기 초 교회는 목회 직임에 대한 의식은 약해졌고, 교황청의 세금징수에 대한 분노는 증대됐다.


성인숭배사상은 이전 세기들보다 진척됐다. 마리아 숭배는 진노하는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시하고 서슴없이 마리아를 화해하고 구원하는 힘으로 이해했다. 마리아의 무흠수태에 대한 가르침은 마리아의 어머니였던 성 안나(루터가 회심 때 부른 안나는 마리아)에 대한 숭배도 강화했다. 또한 마구간의 소까지도 수호성인을 갖고 있다고 가르쳤다.


성유물숭배 역시 할 수 있는 만큼 최상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성유물 안에서 신자들에게 신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 안에서 붙잡을 수 있는 형태로 다가섰다. 게다가 성유물 숭배에 사면이 결부됐다. 사람들은 성유물들을 모았고, 루터의 군주였던 현인 프리드리히는 1509년까지 이미 5005개의 성유물들을 모았다.


이전에 그리스도교와 상관없는 민속신앙(미신)으로 간주했으나 아크뷔노의 토마스가 처음으로 교회의 가르침에 첨가했던 마녀망상을 독일에서는 쾰른의 도미니쿠스 수도사이며 종교재판관들인 하인리히 인스티노리스와 야콥 스프렝거가  인노센트 8세 교황의 교서 “최상의 감정을 통하여 갈망하였던 자들은”(1484)를 기초하여 세부항목에 따라 마녀재판을 감행했다. 약 1700년까지 마녀로 화형에 처해졌던 소녀들과 여자들이 10만 명에 달했다.


가브리엘 비엘에게서 보듯 16세기 문턱에서 ‘근대의 경건’은 대표적인 신앙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381년 데벤테르의 게에르트 그로테(1340-1384)에 의하여 시작됐다. ‘그리스도를 따라 삶으로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여 덕스러운 삶을 살도록 인간의지를 새롭게 하는 것’이 운동의 목적이다. 대표적인 서적은 켐펜의 토마스가 쓴, 그러나 후에 필사자가 자신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명상내용들을 첨가시킨 ‘그리스도를 본받아’이다. 이 같은 운동을 대표하는 자 가운데 하나인 베젤 강스포르트(1419-1489)는 ‘전통은 오직 성경을 해석하고 교회는 성서에 의하여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는 루터의 칭의론과 유사한 가르침을 가르쳤고, 루터는 강스포르트의 책들을 모아 ‘신학적인 사상들의 혼합내용(신학총서)’라는 작은 전집을 출판하면서 자신이 ‘모든 것을 그로부터 넘겨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WA 10 II, 317)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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