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성격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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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성격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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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12.0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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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의 예술을 향하여 - 시어벨트(Seerveld)의 개혁주의 미학 (31)

▲ 안용준 목사
한국의 크리스천들, 특별히 목회자들과 예술가들은 한국의 교회가 그 규모와 잠재력에 비해 사회 문화적 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아파한다. 이미 ‘개혁주의 문화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을 변혁시키기 위한 가르침이 들어와 있건만 이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많이 부족하다. 신학교육 중심의 엄숙주의로 교육받은 일부 목회자들은 기독교문화예술 운동을 지나친 인본주의의 발현으로 보려는 경향이 상존한다.

하지만 “복음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는 거룩하고 신비스런 일이 기록되어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고.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의 성막에 내려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내용이다. 곧 예수님은 유대인이 되셨다는 의미이다. 이뿐이겠는가. 아람어를 쓰시고, 유대인의 생활 풍습 속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문화적인 갈등을 하셨다.

시어벨트는 이렇게 강조한다. “이 시대의 세속적 흐름에 앞서가는 예술가들이 과학적 합리성에 대항하는 방법들을 창안하고, 정신분석화 된 초현실주의를 완성했을 때, 우리는 시대의 흐름과 거리 있는 1920년대의 기도자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는지? 히피족이 미국의 문화적 물질주의를 주도하고 있을 무렵,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교회 안으로 숨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우리 크리스천은 몇 세기에 머물고 있는지?”
이 사실은 크리스천의 예술의식이 시대의 흐름에 얼마나 뒤쳐져 있는가를 보여준다. 예술에 대해 무관심한 크리스천의 태도가 낳은 결과이다. 이 태도는 예술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유래한다. 크리스천들조차 역사적으로 이미지에 대한 불행의 기억 때문인지 아직도 예술(특히 시각예술)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예술을 성경과 분리해서 이해하려는 시각도 존재한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술을 추구하더라도 그들의 신앙과 예술의 통합을 도와줄 자료들은 미비하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종교개혁의 역사 안에도 생명력 있는 예술에 대한 긍정적 가치를 피력한 개혁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크리스천에게 큰 격려와 자극이 된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사람들이 이미지를 느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사실상 피할 수 없는 일로 파악하였다. 그는 어떤 형태를 만드는 것을 ‘자연적인 인간심리 과정의 부분’(natural part of psychological process of man)으로 간주하였다.

시어벨트는 역사 안에서 다양하게 변화하는 예술의 상황에 탁월하게 대처하기 위해 ‘성경적 지혜’가 요구된다고 한다. 그 지혜란 절망스런 현실에서 회복되어 생명력 있는 예술의 창안으로 힘을 모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인간 본연의 형상마저도 상실한 예술에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영원한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축제의 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구속적 예술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 의해 실현되는 것으로서 생명을 담아내는 예술이다. 이 예술은 예술가 자신의 삶이 체현된 영원한 구원과 소망이 작품 안에 드러나게 되는데, 이것이 ‘샬롬의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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