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탄압은 성경변개 등 그리스도교 말살 정책으로 최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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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탄압은 성경변개 등 그리스도교 말살 정책으로 최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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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11.19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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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하의 한국교회 V (일제 말의 한국교회)
▲ 조병하 교수

일제 말 민족말살정책과 일제하의 신사참배의 강요는 한국 그리스도교에 많은 문제를 가져다주었다. 초대교회부터 그리스도교와 사회 및 국가와의 충돌은 근본적으로 신에 대한 이해에서 발생했다. 예외 없이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는 한국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천황의 조상신인 신화적 인물 천조대신을 숭배하고 신사를 참배하도록 강요하는 일본제국이 대립되면서 한국 교회에 대한 일제의 박해가 발생했다.

박해 중 그 결국에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폐쇄냐 아니면 나름 생존의 길을 찾아야 하느냐의 결단의 기로에 섰다. 오늘날, 우리들이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면, 결국은 일제가 망했고 해방이 되었지만 박해 당시를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존을 위하여 몸부림쳐야만 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결의 한 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도대책은 1938년 2월에 세워졌고, 1940년에는 지도 방침이 정해졌다.

압제의 시간이 진행되면서 일제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회유를 시도하였고, 그리스도교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였으며, 친일화 정책을 폈다. 도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일제의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논리와 싸워야 했다. 그리고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라 조상과 선열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국민의례라는 회유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청으로부터 신사참배가 애국심과 충성의 표현인 국가적인 의식이라는 이해와 함께 신사참배를 허용 받았다. 프로테스탄트교회들 역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천황이 신에서 인간으로 환원했다고 가르친다는 점이나 그리스도교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교 지도자들 중에는 친일계 인사들을 규합하여 일본 그리스도교에 충실할 것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1938년 7월 7일에는 부민관에서 황국신민으로 보국할 것을 목적으로 조선기독교연합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1938년 12월 12일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 일본 신궁 참배단이 참배를 위하여 출발하였다. 1939년 4월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했다. 1939년에 종교단체법을 공포하여 주일학교는 연수회로, 부흥회는 연성회로 하였으며, 면려 청년회를 해산했다. 1940년 10월 감리교회 총리원 이사회는 대동아 공영권과 내선 일체의 원칙을 받아들이도록 결정했다. 1942년 10월 31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모였던 장로회 총회의 총회록 기록에는 무기제조용으로 교회의 종이 1540개가 헌납되었던 것을 나타났다. 또한 1943년부터는 주일예배만 인정되었고 밤예배는 금지되었다.

최악에 이른 일제의 탄압은 강력하게 조선총독부의 그리스도교와 민족말살 정책으로 나타났다. 신사참배로 그리스도교의 어용화가 이루어졌고, 1940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창설했다. 1941년 12월에 진주만을 포격함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선교사들을 추방했다. 최종적으로 1942년 6월 1일 99명의 선교사들이 출국당하면서 모든 선교사들이 떠나게 됐다. 또한 교회의 재산을 동결했으며, 교회의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했다. 모세오경과 요한계시록을 삭제하도록 요구하여 성경의 변개뿐만 아니라 찬송가 가사들도 바꾸고 삭제하도록 요구했다. 찬송가에서 “왕”을 “주”로 바꾸도록 요구했고, 후에는 사복음서만을 허용했다.

1943년 이후에는 더욱 악랄해져서 황성요배를 강요했고, 일장기에 배례를 요구했다. 교회의 집회의 명칭을 강요했으며, 주일을 폐지시키고자 휴일에 근무할 것을 명령 내렸고, 또한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청정(淸靜, 미소기바라이)례로 대체됐다. 1943년 5월 10일에는 침례교(동아기독교)가 해체와 더불어 32명의 교역자가 구속됐다. 성결교는 1941년부터 일본인이 관할하게 됐다. 1943년 5월에는 성결교 200명의 교역자들이 구속됐으며, 12월 29일에는 교단과 신학교가 폐쇄 됐다. 1943년 12월 28일에 안식교도 해산되었다.

1942년에는 새문안에 조선기독교합동준비위원회를 소집하여 ‘새시대 새교회’ 설립을 시도했다. 1942년 3월 조선혁신교단을 조직하고 헌법을 제정했다. 같은 해 4월 30일에는 조선감리교단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호칭하게 됐다. 그리고 1945년 7월 19일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조직되었으나 곧 바로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말살 정책으로 체포 구금됐던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살해하고자 하는 계획이 1945년 8월 17일로 세워져 있었다.

일제의 교회말살 정책으로 신학교육 역시 위기를 맞게 됐다. 1938년 9월 20일 신사참배 반대와 더불어 무기 휴학을 했던 평양신학교를 재건하려는 운동들이 일어났다. 1940년 4월 19일에는 “충군유위한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조선신학교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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