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춘풍, 지기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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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춘풍, 지기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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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8.19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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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상기 목사 / 예수로교회

한국과 로마가톨릭교회의 첫 만남은 참으로 불행했다. 임진왜란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군단의 병사들은 대부분 로마가톨릭교회 신자들이었다. 조선 침략 군단의 이름은 ‘그리스도단’이고, 그 침략군단 앞에는 십자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고, 검정색 사제복에 로만 컬러를 한 로마가톨릭교회 사제들이 뒤따랐다. 세스페데스가 이끄는 예수회 소속 사제들이었다. 예수회 사제들은 조선인을 잔혹하게 살육한 자들의 고백성사를 받아주고 성수를 뿌리면서 조선침략 행렬에 가담했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우리 나라와 민족은 큰일 날 뻔했다. 근간 개봉한 영화 ‘명랑’이 주는 메시지를 깊이 새겨보자. ‘채근담’에 이르기를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했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하고,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차갑게 대하라’는 자기성찰의 동양적 리더십의 덕목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탁월한 종교지도자요 리더십의 소유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가 방문했던 곳마다 수만 명의 구름 인파가 몰렸고, 비파 파파(Viva Papa-교황만세)의 구호가 연일 매스컴을 장악했다. 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그 울림과 여운이 너무도 달랐다. 메신저(Messenger)의 인격이 메시지(Message)의 반향을 주도했다. 이번 프라치스코 교황의 방한 행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500년 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분리된 뒤 천주교 내부 개혁을 이끌며 다양한 문화 전통에서 선교의 선봉에 섰던 예수회원다운 영적인 스킴(scheme)이 그의 모습과 행적 속에 서려있다. 그의 이번 방한 목적은 사목(司牧)이지만 양들의 침묵을 강요하는 목자가 아니었다. 가난한 이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헌신에 역동적이었다. 교회 안에 있는 성직자들의 엉덩이를 걷어차 밖으로 내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그리스도인에서 전 인류로 확대’하고, 선교는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인류의 공동선 증진’이라며 타인 및 타문화•종교에 대한 존중을 강화했다.

메시아처럼 등장한 교황의 말 한마디와 미소 한 먹음에 모두가 열광하고 감격하고 아비와 스승의 수백마디 채찍과 교훈보다 더없는 위로와 희망이 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 땅에 그렇게 많은 성직자와 성도들과 수없는 정치가와 지식인과 전문가들의 그간 어디서 무엇을 하였기에, 그분께 매달려 목마른 위로를 구하는 것인지 부끄럽고 초라함이 속절없는 눈물이 된다.

침묵의 카르텔(cartel) 속의 개신교는 이제 무언가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번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우리 개신교에서도 높은 인품과 영성을 지닌 지도자들께서 더욱더 자기 정비의 선한 계기로 삼아, 교권 행사나 세상적 명예 추구보다도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의 성품을 계발하기를 기원해 본다.

교황을 미화하고 교회를 비하하지 말라. 성당과 교회는 무엇이 다르고 교회와 교권은 무엇이 다르며 만인제사장직과 만인구원교리가 무엇이 다른지를 가르쳐야 한다. 복음의 진수를 희석시키면 구원의 터는 무너진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종교적 관용이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교제와 그의 온유한 성품을 닮아가는 성화에서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주이시다.

종교다원주의는 수용될 수 없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온다는 사랑의 간증과 겸허의 설득에 의해서만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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