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높은 곳 아라랏 산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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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높은 곳 아라랏 산을 향하여
  • 승인 2003.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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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오후 2시 경, 등산 장비와 물품들을 가득 실은 특수 산악용 지프차는 셀파와 포터 각기 두 명씩을 태우고 도베야짓 마을을 서서히 빠져 나갔다.

일찍부터 이 마을은 실크로드가 통하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던 탓에 동서 문물의 요긴한 중개 장소로 이용되어져 왔다.

최근에는 노아의 방주 흔적을 찾아보려는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때아닌 관광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스팔트 대로변에 말이나 소가 우마차를 끌고 가고 그 곁을 벤츠 승용차가 유유히 지나가는 거리의 모습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한 공간 안에서 별무리 없이 공존할 수 있음을 여유스럽게 보여주었다.

아라랏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산악 검문소에서 입산 허가증을 내보인 후 곧장 쿠르드인들만이 모여 사는 한적한 산간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차 소리에 놀란 개들이 컹컹 짖으며 차 곁으로 달려드는가 하면 문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보며 수줍은 듯 미소짓는 앳띤 소녀들과 엄마 치마폭에 반쯤 몸을 숨기고 까만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어린아이들이 인상적으로 눈에 띄었다.

만일 집 구석 구석마다 세워져 있는 텔레비젼 안테나나 마을 중앙에 우뚝 솟은 회교의 모스크만 없었다면 쿠르드인의 마을은 때묻지 않은 자연 속의 한 부분으로 계속 남겨져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 산 중턱 마을은 해발 1,650m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하루 밤을 지낼 첫 번째 야영지까지 가려면 최소한 400여 m를 더 올라가야만 했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느 곳이 길인지를 분간하지 못할 만큼 끝없는 눈의 수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세상의 눈이란 눈은 모두 아라랏 산에 쏟아져 내린 것처럼 온 천지는 그야말로 눈, 눈, 눈의 세계였다.

문득 노벨상 수상작가가 쓴 설국(雪國)의 첫 대목이 기억 속에 떠올랐다. ꡒ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진 것 같았다." 만일 가와바타 야스나리씨가 이 아라랏 산에 와서 저 엄청난 폭설들을 보았다면 그 전경을 무엇이라고 표현했을까? 눈을 감고도 아라랏 산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치던 젊은 운전기사는 혀를 끌끌 차면서 엉금엉금 기어가듯 차를 몰았다.

얼마를 달리던 차는 덜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폭싹 주저앉고 말았다. 모두가 내려서 눈을 치우고 돌들로 채운 후 힘껏 밀어 보았지만 헛 바퀴만 돌 뿐 차는 빠져나갈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기를 반 시간 여, 간신히 차를 빼어내기는 했지만, 그 후에도 몇 차례나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이윽고 파라슈트씨와 포터들 사이에 신경질적인 고성이 오가더니 갑자기 운전기사와 포터 두 사람이 짐들을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훌쩍 산을 내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던 파라슈트씨와 셀파 메멧 그리고 필자 세 사람은 거의 2백 여 kg이나 되는 짐들을 나눠지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 희미한 눈빛으로만 어렴풋이 길을 찾을 수 있었고 골짜기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은 갑자기 밀려온 강추위와 합쳐져 턱에서 덜덜 소리가 날 정도로 추위에 떨게 했다.

말로만 들어왔던 아라랏의 그 세계적인 추위(?)가 마치 그 명성을 입증하려는 듯이 살인적인 냉기를 뿜어내며 달려든 것이다.

한 길씩 쌓인 눈을 헤쳐가며 올라가기를 3시간 여, 온 몸의 기운이 거의 다 빠져갈 무렵 우리 일행은 가까스로 첫 번째 야영지에 도착하였다.

그 곳은 쿠르드인들이 산중에서 길을 잃었을 때나 혹은 양들을 맹수들로부터 잠시 대피시키려 할 때 사용하기 위해 지은 허술한 움막집이었다. 짐들을 내려놓자마자 갑자기 피곤과 허기가 한꺼번에 몰려왔고 차디찬 바람이 몸 안으로 매섭게 파고 들어왔다.

그런데 일이 꼬일려고 해서 그런지 설상가상으로 물을 끓이려고 가져온 가스 버너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몇 번이고 불을 켜 보려고 시도하던 파라슈트씨는 가스통을 발로 툭 차버리고 동료 메멧과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한참 후에 두 사람은 비닐 봉지에 무엇인가를 가득 담고 들어왔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꽁꽁 언 가축의 오물들이었다. 그들은 움막 천장에 붙어있는 짚들을 조금씩 뜯어내고 밖에 있는 엉겅퀴 줄기들을 모아다가 불을 붙인 후 그 위에 오물들을 차곡차곡 쌓아 얹어 놓았다.

삽시간에 움막 안은 눈을 뜰 수 없으리만큼 누런 연기와 메케한 연기로 꽉 들어찼다. 연신 기침을 해내다가 잠시 밖으로 나왔는데, 이 번에는 영하 35도의 강추위가 기다렸다는 듯이 온 몸을 감싸 안았다.

몇 번이고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사이, 물이 끓었다고 종이컵에 뜨거운 차와 수프 한 그릇을 건네주었다.

치즈를 넣은 마른 빵과 과자, 건포도 등으로 간단히 요기를 한 후 텐트를 치고 슬리핑 백을 깔았다. 맹수의 침입에 대비하여 움막 입구는 큰 돌로 막았고 옆에는 총과 칼을 놓아 두었다.

슬리핑 백 속에 들어갔으나 오래 쓰지 않고 보관했던지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생선 썩은 것 같은 악취가 나서 머리는 밖으로 내어 밀었다.

그랬더니 머리 위에 얼음 주머니를 올려놓은 것처럼 온 몸의 체온이 식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추위와의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동안 어디선가 길게 우~우 내뽑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아라랏 골짜기를 울리면서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아마도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굶주린 이리나 새끼를 애타게 부르는 어미 늑대의 울음소리이겠지.

아라랏 산의 첫 밤은 맹수의 울부짖는 소리와 세차게 부는 겨울의 칼바람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동방에서 온 순례자를 밤새도록 추위와 불안 속에 떨게 만들었다. ꡒ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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