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의술’ 통해 하나님 전하고 싶은 ‘예스 우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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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의술’ 통해 하나님 전하고 싶은 ‘예스 우먼’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4.01.22 0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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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자를 치료하는 송은경 원장
‘착한 병원’ 예스치과의원 송은경 원장.
요즘 ‘착한식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만큼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불신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사실 식당 못지않게 착한 마음씨가 필요한 곳이 병원, 그중에서도 치과다. 서울 양천구에 위치한 예스치과의원의 문을 열면 안내데스크에 ‘착한병원’이란 작은 표지가 시선을 끈다.

“그동안 개인적인 기부는 해왔지만 치과 이름으로는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착한가게’ 캠페인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착한 병원이라 지칭되면 그만큼 더 긴장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환자들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대하겠죠. 어려운 이웃과도 더불어 살려고 노력 하겠고요.”

이 병원의 송은경 원장(한성교회 집사)은 이전부터 어려운 사람을 보면 늘 마음이 불편했다. 뭔가 작은 것이라도 해드리면 편해지는 마음. 그녀는 이것이 아마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치대 들어가자 닥친 시련들
경남 김해의 치과에서 일할 때에는 주변의 외국인 노동자들, 지적 장애인들을 정성껏 치료해주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다른 병원 같으면 꺼리거나 기피할 대상이었던 이들을, 그녀는 가족 같은 마음으로 돌봐주었다. 나중에 그녀가 개원해서 병원을 옮기자, 물어물어 찾아올 정도였다.

치과의사로서 어려운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일은, 사실 하나님과의 서원을 지키는 일이다. 수학교사를 꿈꿨던 그녀는 원래 사범대를 가려고 했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교원 자격에 신장도 제한이 있다는 기사를 보게 된다. 키 150cm가 커트라인인데, 조금 못 미쳤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제가 모태신앙인데, 엄마가 어려서부터 늘 그러셨거든요. 하나님께서 널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있다. 너는 소중한 아이다. 이러면서 제 자존감을 세워주셨어요. 그래서 키 작다고 콤플렉스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때 처음 키 때문에 좌절감을 느꼈죠.”

사범대를 포기하고 부산대 생물학과에 들어갔지만,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덧없이 세월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던지, 가족은 다시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그때가 97년 봄, 그녀 나이 27세였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다. ‘이 길을 가게 해주시면 저의 재능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오랫동안 쉬었다 시작한 공부였는데, 성적이 좋게 나왔다. 서울의 명문대를 맘속에 품었다.

“그런데 그때 IMF가 터지면서 수험생들이 다 의대나 치대, 사범대와 같은 전문 직종으로 몰렸어요. 제가 생각했던 대학엔 갈 수 없었고, 학비가 싼 국립대 강릉 치대를 들어간 거죠. 사실 그것도 감사한 일인데, 그때는 마음이 좀 안 좋았죠.”

게다가 IMF의 영향으로 아버지마저 신문보급소를 그만 두어야 했다. 치대의 비싼 학비에 경제적 형편은 더 악화됐다. 그해 가을에는 교통사고로 전신마취를 해야 할 만큼 크게 다쳤다. 후회가 밀려왔다. 이게 아닌가? 학업을 포기하고 다시 돈을 벌어야 하지 않을까?

▲ 아들 주원이와 함께
우량아 ‘주원’이를 얻기까지
“정말 힘든 때였어요.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저를 일으켜 세워주시더라고요. 공부를 많이 안했는데도 더 큰 장학금을 받게 해주셨어요. 6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성적으로 들어가는 기숙사도 들어가고, 그래서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게 해주셨어요. 아마 사립대였다면 포기했을 거예요.”

하나님은 때로는 시련을 통해 우리를 바짝 낮추신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낼 수 있도록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매인 사람이 된다. 그 다음에 어떤, 더욱 큰 시련과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기죽지 않는.

인터뷰를 하던 날은, 마침 송 원장의 아들 ‘주원’이가 100일째 되던 날이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소중한 날이겠지만, 송 원장에게는 더욱 남달랐다. 사실 그녀는 이전까지 여러 번 아이를 유산했다. 지난 2010년, 다시 어렵게 임신했다. 그해 10월 김해의 치과를 정리했다. 이제 주말부부를 끝내고,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남편과 합쳐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준비했는데, 출산 예정일을 얼마 앞두고 아이가 잘못됐다. 아이를 사산한 그녀는 출산 후유증까지 겹쳤다. 가만히 있어도 그냥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날이 많아졌다. 정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지옥 간다’는 원초적 신앙이 아니었다면, 자칫 삶을 놓을 뻔 했다. 그 후로도 또 유산의 아픔을 겪었다.

“마음을 비웠죠. 그전까지는 꼭 아이를 달라고 기도했는데, 이젠 주시면 감사하고 안주셔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바뀌었어요.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더라고요. 그리고 오늘이 바로 100일이예요.”

주님이 원하시는 아들, ‘주원’이는 우량아였다. 무려 몸무게 4.1kg에 키도 평균보다 1cm나 더 큰 하나님의 선물. 작은 키의 좌절을 겪었던, 또 이미 여러 차례 유산과 사산의 험한 길을 헤쳐 나온 엄마에겐, 그 동안 누적된 모든 우울함을 날려버리는 통쾌한 한방이었다.

▲ 직원들과 함께

민락시장서 전도하던 꼬맹이
“참 힘든 시절이었는데요, 남편의 믿음은 더 깊어졌어요. 결혼 처음엔 거의 믿음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아이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매일 밤 함께 기도 드렸어요. 처음엔 기도를 잘 못하던 남편이 어느 때부터인가 잘해요. 나중엔 먼저 기도하자고 말할 정도로요. 지난 해 봄엔 세례도 받았습니다.”

고난으로 인해 기도하는 아버지, 기도하는 남편이 되었다. 아이로 인한 고난을 통해 이 부부의 사랑과 믿음은 그 뿌리가 더 단단해졌다. 또 다시 어떤 인생의 칼바람이 가지를 뒤흔들어도 떨지 않을 만큼.

가끔 송 원장이 트는 카세트테이프가 있다. 요즘 시대에는 유물이 되어버린 낡은 테이프. 틀면 거기서 웬 꼬맹이의 노래 소리가 나온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볼 때….’ 초등학교 2학년짜리, 송은경의 목소리다. 아빠 송세호 안수집사와 엄마 윤복자 권사는 그 시절에 아이들과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종종 찬송을 녹음했다.

“그 어린 나이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어요. 어느 날 예배 드리다가 저 혼자 뒷방에 가서 울면서 회개하고 기도했죠. 지옥가게 할 것 같은 내 죄를 다 하나님께 고백하고요. 그 어릴 적에 근처 민락시장을 돌아다니며 전도까지 했어요. 유명한 아이였죠. 그때 신앙이 오늘까지 저를 인도한 것 같아요.”

인생의 아픈 시절이 전혀 없었던 사람처럼, 송 원장은 늘 웃는 상이다.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안다. 환자들의 통증을, 그 마음까지 헤아려 감싸줄 깊은 품을 가진 의사. 체구는 작지만 마음은 큰 송 원장, 오늘도 만만치 않은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예스(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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