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것은 행복이죠, 입양은 어려운 일이 아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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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것은 행복이죠, 입양은 어려운 일이 아녜요”
  • 김동근 기자
  • 승인 2014.01.08 1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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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으로 하나님 사랑 실천한 김신혜 권사
▲ 지난해 5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던 날 온가족이 모였다. 왼쪽부터 셋째 진, 위탁아 호현, 어머니 김신혜 권사, 막내 에스더, 아버지 유영선 장로, 둘째 하연, 첫째 상연. <사진=김신혜 권사 제공>

죽음의 문턱도 넘겼다. 다시는 세상을 바라보지 못할 위기도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숨을 이어가셨다. 남겨진 아이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뜻 같았다. 네 명의 자녀 중 배 아파 낳은 자녀는 첫째 하나, 나머지 세 아이는 가슴으로 낳았다. 둘째는 여섯 살에 입양했고, 셋째는 다섯 살에, 막내는 네 살에 입양했다. 보통 아이가 신생아일 때 입양하는 것과 달리 그는 ‘연장아’ 입양을 선택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치며 살아온 삶 속 지난해 5월 입양의 날, 그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그는 “하늘 상급이 줄어들었다”며 웃음 지었다. 아이들을 가슴으로 낳은 김신혜 권사를 만났다.

생각만 하던 입양, 아이를 품다
결혼 전부터 언론에서 입양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면 관심이 갔다. 궁금했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어머니가 되어주고 싶었다. 결혼을 하면서 아이는 하나만 낳고 나머지는 입양하자는 제안에 남편도 쉽게 응했다. 가족 중 누군가의 반대로 입양을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입양과 더불어 위탁을 통해 여러 아이들을 곁에 두었어요. 둘째를 여섯 살(올해 23세)에 입양했는데, 처음엔 속을 많이 썩였죠. 당시 피아노학원을 운영했었는데 주변의 오락실이나 좋지 않은 환경들 때문에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지 못한다는 생각이 컸어요. 학원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당시 알아본 대안학교가 있던 강원도 횡성으로 아이와 단둘이 떠났습니다.”

처음엔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며, 아이를 변화시킬 방법만 찾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횡성에서 아이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에 대한 무관심에 대한 반발로 그런 행동들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데서 생각이 멈췄다.

“아이의 문제가 아니었던 거죠. 집에 데리고 왔다면 더욱 사랑을 베풀고 책임을 져야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그러지 못했어요. 횡성으로 가 아이에게 사랑을 쏟았더니 아이가 처음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죠.”

횡성으로 이사한지 1년 만에 집을 지을 수 있는 여력이 생겼고, 가족들과 함께 머물 따뜻하고 포근한 집을 짓게 됐다. 그렇게 여유가 찾아오는 듯 했다. 횡성에 도착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시작했던 감자떡 사업. 돌봐야 할 아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과 손은 감자떡으로 향했다.

“장사가 굉장히 잘 됐어요. 찾는 사람도 많았고요. 하나님이 도우신다고 생각했죠. 자만하기도 했어요. 감자떡 사업을 시작한지 1년이 되었을 때,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어요. 병원에 가보니 녹내장이라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죠.”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감자떡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사업은 잘 되었지만 계속 빚이 쌓여갔기 때문이었다. 녹내장도 쉽게 낫질 않았고, 결국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대에 올라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눈을 다시 보이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회개할 수 있도록 말씀을 달라는 기도였다.
수술이 끝나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다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회복을 허락하셨다.

집안에 찾아온 ‘복덩이’

여유를 찾아가고 있을 즈음 유치원,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반편견 입양 교육’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입양 통계표를 설명하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대부분의 장애아동들은 해외로 입양되거나 시설에서 보호한다는 것.

“비장애아동들은 제가 아니어도 많이들 하니까 장애아동을 입양하는 것이 어떠냐고 남편에게 제안했어요. 또 당시 저희 가정에서 위탁해 기르고 있던 두 형제도 있었는데, 이 아이들에게 봉사심을 키워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그렇게 집에 찾아온 진이(13세). 뇌병변을 앓고 있어 종일 앉아서 지내던 여섯 살 아이가 집에 왔다.
“처음엔 진이가 고집이 세 가족들을 많이 힘들게 했어요. 그런 진이를 다른 아이들이 배려해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는데, 눈곱만큼도 배려심이 없었어요. 장애아동의 특성을 이해하기엔 아이들이 너무 어렸던 것 같아요.”

고집이 센 셋째 진이와 1년을 넘게 씨름하던 그가 갑작스레 쓰러졌다. 병원에서 진단한 그의 병명은 뇌종양. 그렇게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셨던 감자떡 사업을 그때까지도 쥐고 있던 그였다. 함께 지내던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고, 다시금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사랑에 빠져있는 저의 모습, 모든 영광이 하나님이 아닌 저에게 머물러있는 환상을 보여주시며 ‘네가 하는 일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회개의 마음을 갖게 하셨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이 밀려왔습니다.”

들것에 실려 들어온 병원을 김 권사는 자신의 발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그가 열흘 만에 회복한 것을 믿지 못하던 병원은 일주일간 그를 더 붙잡아 두었고 보름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엄마 울지마”
뇌종양에서 치료받은 후 그 때까지도 감자떡 사업을 내려놓지 못하던 김 권사는 스스로 “저는 깨닫는 게 더디다”고 겸연쩍어 했다. 그때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가 “하나님께서 감자떡을 그만두게 하시려면 주문이 들어오지 않게 해 달라”는 것. 그런데 거짓말처럼 다음날부터 주문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후 하나님은 그가 초등학교에 특수교육지도사로 취업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다. 생활이 안정을 되찾았고, 마지막으로 한 아이만 더 입양하자는 생각을 가졌다. 그때 그의 나이 58세. 입양은 60세까지 가능했다.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제가 경제적 능력이 없고, 나이가 많으며, 아이들도 많다는 이유로 입양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고 포기하려는 찰나, 한 시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네 살짜리 여자아이가 있다고요. 그 아이가 우리 막내딸 에스더(6세)입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입양한 아이는 집에 와서도 일주일 넘게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막 살만해서 막내를 입양했는데, 직장도 잃고 말았다. 너무 실망해서 울고 있을 때 아이가 그의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고사리 손으로 닦아주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엄마 울지마”.

“저는 놀라서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다시 취업이 될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젊은 선생님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정년까지 다시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목에 건 동백장
“셋째 아이가 장애등급 재판정을 받았는데, 1급이었던 아이가 5급을 받았어요. 정부와 싸웠죠. 당시 그 아이를 돌보려면 정부의 지원이 필요했는데, 5급 판정을 받으면 지원이 끊어졌거든요. 그런데, 그게 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지난해 5월 그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다른 이들보다 입양의 역사가 길었고, 셋째의 장애등급이 1급에서 5급으로 낮아진 부분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사실 셋째의 장애등급이 낮아진 것은 지금 위탁받아 기르고 있는 호현이(12세) 덕분이에요. 호현이가 워낙 에너지가 넘치는데, 특히 ‘런닝맨’을 좋아해서 진이를 그렇게 쫓아다녔어요. 진이는 도망 다니느라 바빴고요. 많이 움직여야 건강해지는 아이를 계속 도망 다니게 하니까 좋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한편, 그는 2012년 8월 입양특례법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입양이 줄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입양특례법은 생모가 직접 출생신고를 한 뒤 일주일간 숙려기간을 거치고, 기존 신고제였던 것을 허가제로 바꾸는 것이 골자다.)

“입양특례법이 시행된 후 출생신고를 해야 하니까 유기되는 아이들이 늘어난 것이 사실이에요. 뿐만 아니라 복잡해진 입양절차 때문에 입양을 생각했던 이들이 포기하는 경우도 늘어났죠. 때문에 과거 대다수였던 비밀 입양도 사라졌어요. 모 교회의 ‘베이비 박스’의 철거명령이 내려진 것도 이 때문이죠. 이 문제에 교회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이상 버려지는 아이들이 없도록, 많은 아이들이 새로운 부모를 만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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