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잉글랜드에 새로운 사회와 국가 건설 위해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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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잉글랜드에 새로운 사회와 국가 건설 위해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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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1.0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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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교회 시작의 역사
▲ 조병하 교수

1492년 10월 12일 크리스토퍼 콜럼부스(1451-1506)가 신대륙을 발견한 일은 유럽인들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당시 종교, 사회, 지식, 경제 등에 있어서 팽창기를 맞았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앞 다투어 신대륙에 진출하였다.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스웨덴 등이 열광적이었다. 영국은 1497년에 신대륙을 방문하였으나 국내 사정으로 진출이 늦어져 1584년 엘리자베스 1세가 원정을 결심하면서 본격적으로 식민지 건설을 시작하였다. 콜럼부스는 원주민들과 첫 접촉 때에 그의 일기에서 “우리의 거룩한 신앙으로 그들을 개종시킬 방법”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쓰고 있고, 그가 1493년 두 번째 항해 때에는 탁발 수도사들을 데리고 갔다.

이 후에 수많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선교사들이 유럽의 가톨릭교회의 이주자들과 함께 아메리카에 파송되었다. 이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아메리카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신세계에 도착하기 이전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스페인을 중심으로 아메리카의 서남부에서, 프랑스 가톨릭선교사들은 오늘의 캐나다 지역에서 인디오들을 개종시키려고 활동하고 있었다. 1630년이 되기 이전에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본진이 보스턴 땅에 도착했을 때에는 선진들이 뉴 암스테르담을 세워 놓고 있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여려 그리스도교 유형의 신자들이 이미 영국 퀘이커 교도들이 자리 잡고 있었던 펜실베이니아로,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장로교도들은 롱 아일랜드, 뉴저지와 펜실베이니아로 옮겨왔다.

청교도 혁명으로 인한 영국의 변화는 신세계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마크 A. 롤에 의하면 1630년대에 아메리카로 옮겨간 영국의 청교도들의 신념들은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 ‘청교도들 간에 성서의 요구에 대한 해석은 달랐으나 성서의 권위를 강조(영국에 사는 청교도들이 교회-국가의 조직이론을 옹호했던 것에 비하여 뉴잉글랜드로 온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회중의 조직을 성서가 지시하고 회중조직은 국가와 연대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통일된 전체로서 사회 창조’, ‘하나님의 언약을 통한 일하심’을 강조한다.

역사가들은 세속적인 성격을 지닌 영국인들의 정착지로 1607년 제임스타운에 건설되었던 버지니아 식민지를 들고 있다. 그래서 역사 기술에서 보다 후기에 정착하게 되었던 플리머스나 매사추세츠의 청교도 정착지들과 대조시켰었다. 영국 청교도 박해를 피해 1608년 존 로빈슨 목사의 지도하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라이덴으로 피신하였던 청교도들은 네덜란드에 호감을 갖지 못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1620년 9월 6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버지니아로 향했으나 항해 중 폭풍우에 밀려 플리머스의 케이프 코드에 11월 초 도착하였다. 이들은 그곳에 머물기로 합의하고 식민지를 위한 하나의 계약에 서명하였다. 102명의 순례자들 중 절반이상이 첫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서 죽었으나 안전한 거주지를 세워 1630년경에는 300명에 이르렀고 점차 번성해 갔다. 공동체는 회중교회의 예배형태를 취하였다.

이러한 역사배경들에도 불구하고 현대 미국인에게 있어서 과거 신앙에 대하여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에 대한 생각이 지배하게 된 이유들은 우선 청교도들이 초기에 아메리카를 위하여 유력한 지도자들을 배출하였고, 청교도들의 도덕적인 비전은 매우 결렬하여 후대에 거의 모든 미국인들에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청교도를 연구해온 거의 모든 사람들이 청교도들의 “도덕적인 에너지가 참으로 특출했다.”는 밀러의 주장에 동의한다.(롤) 청교도주의는 분리주의적 회중주의자들에 의하여 세웠던 플리머스, 1691년에 플리머스를 포함했던 매사추세츠, 신세계 청교도주의를 가장 엄격하게 실험하였던 뉴헤이븐, 1634년 메사추세츠에서 떠나 세웠던 코네티컷을 지배했었다. 청교도들은 뉴잉글랜드에 그들의 신앙에 근거하여 새로운 사회와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곳은 아직 영국 왕의 통치하에 있는 식민지였다. 1642년에는 뉴잉글랜드에 내전이 일어나 청교도 공화정이 왕정을 대신하였고 1686년에는 자치령이 세워졌다.

영국에서 개혁주의신학을 따르는 이들의 교회 형태는 국교회인 감독교회, 장로교회, 독립 혹은 회중교회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었다. 뉴잉글랜드에서 회중교회가 중심을 이루었던 것에 비하여 장로교회는 식민지 시기 초기에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1700년 영국 국교회 이주자들이 늘어나면서 1706년 프란시스 매케미(1658-1708) 주도 하에 필라델피아에서 회합을 가져 첫 장로교 노회를 구성하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모델로 하였으나 스코틀랜드와 관계는 없었다. 1716년에는 교회들이 증가하여 대회가 조직되었다. 회중교회와 장로교회는 칼빈주의 신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고백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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