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1004번 안경버스, 다시 움직여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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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1004번 안경버스, 다시 움직여야죠”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4.01.08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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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빛,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안경 케이스를 들고 있는 안효숙 권사. 벽에 걸린 말씀처럼 시작은 정말 미약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나서 육적, 영적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연합이 만난 사람 홀로 남은 ‘큰빛부부안경선교회’의 안효숙 권사

서자로 태어나 건달로 살다가 나이 50에 김천대 안경공학과에 합격했다. 안경사가 되어 전국으로 버스를 몰고 다니며 안경 봉사를 하던 한 남자가 지난 9월 초 세상을 떠났다. 도망자였던 남편을 만나 신앙으로 인생을 바꿔주며 함께 봉사하던 한 여자만이, 이제 홀로 남았다. 고 박종월 장로와 안효숙 권사 이야기다. 안 권사에게는 잊을 수 없는 2013년도 이제 저물어간다. 새해에도, 그들의 유명한 ‘1004번 안경버스’는 다시 굴러갈 수 있을까?

박종월 장로는 생전에 쓴 ‘1004번 안경버스’라는 책에서 이렇게 심정을 고백했다.

‘나 같은 사람도 다른 사람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25인승 버스를 몰고 하얀 가운을 입고 시골에 가면 부러운 시선과 존경의 시선을 받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실 쓰다 버린 휴지조각 같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천사라고 불렀지만 저는 사실 천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막장 인생을 살았습니다. 똑순이 아내를 만나 예수를 믿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 ‘똑순이 아내’ 안효숙 권사는 먼저 하나님 곁으로 간 박종월 장로를 이렇게 회상한다.

서울역 건달과 똑순이의 만남

“장로님은 서자로 태어났어요. 엄마는 첩으로 들어왔다가 장로님을 낳고 혼자만 떠나버렸죠. 나중에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고 어린 장로님만 혼자 헛간 초가집에 남았고, 큰엄마 밑에서 살았는데 보리개떡 하나도 자기만 못 얻어먹고 늘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았대요. 먹을 것이 없어 소나무 껍질을 벗겨 하얀 생채를 먹다가 변비가 걸려 꼬챙이로 대변을 파내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해요.”

항상 배가 고파 ‘묵보’였던 소년 박종월은 어느 날 친엄마가 있다는 곳을 찾아간다. 엄마는 부잣집 후처로 다시 들어가 읍에서 국밥장사를 하고 있었다. 장터에 가보니 정말 엄마가 고깃국이 펄펄 끓는 큰 가마솥 옆에 있었다. 당장 뛰어가 “엄마”라고 부르며 안기고 싶었다. 고깃국도 먹고 싶었다. 그때 엄마 옆에 왠 남자 어른이 보였다. 퍼뜩 돌아가시며 남긴 아버지의 유언이 떠올랐다. ‘엄마를 데리고 간 남자에게 복수해라. 너 낳은 엄마는 네 엄마가 아니다.’ 가슴에서 천둥소리가 울렸다. 소년은 고깃국과 엄마에게서 돌아섰다. 검정 고무신을 벗어 양 손에 쥐고 죽어라 달렸다. ‘원수의 밥은 먹을 수 없다, 절대로, 절대로...’

서울에 올라온 그는 서울역에서 주먹 쓰는 건달로 제법 이름을 날렸다. 남자답게 생긴 얼굴과 ‘깡다구’, 그리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주먹실력 덕분에 그곳에서 처음 인정받았다. 각종 이권 싸움에 개입하며 소년원과 경찰서 유치장을 36번이나 들락날락했다.

“장로님을 처음 만났을 때 수배 중이었어요. 저는 산동네에서 조그만 옷수선집을 하고 있었는데 누구에게 장로님 이야기를 들은 거죠. 세상에 저런 사람도 다 있구나 했죠. 깝깝하더라고요.”

세상에 가장 알쏭달쏭한 것이 남녀관계란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된다. 안 권사의 시골집 마당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처가 어른들이 보기에 탐탁지 않은 이 ‘건달 신랑’은 결혼식 때도 사고를 친다. 친구들이 함을 판다면서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다. 처남의 머리가 터지고 피범벅이 됐다.

“결혼식 날 엄마에게 욕을 징하게 얻어먹었죠. 그래도 제 동생들을 다 장로님이 거뒀어요. 서울 우리 집에서 데리고 학교 보내고 직장 다니고 했죠. 그러니 결혼 때 우리 부모님에게 실망 준 것은 다 갚은 셈이예요.”

‘그때 내가 거기 있었다’
 

서울 행당동 ‘도장굴 시장’ 가는 길 석유집 옆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작은 양장점 안에 들인 단칸방에서 처남들과 옹기종기 살았다. 잘 살아보려고 무던 애도 썼다. 탄광도 가보고, 과일채소장사에 중동 파견 근로도 갔다 왔다.

“장로님이 중동에서 돌아오던 날 공항에서부터 제가 눈을 안마주쳤어요. 1년 떨어져 있으면서 이렇게 계속 살아선 안되겠다는 마음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보따리를 가짜로 하나 싸놓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담판을 지었죠. 교회 갈거냐, 안갈거냐. 교회 안가면 나는 소망이 없으니 갈란다. 그랬더니, 순순히 교회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안 권사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장 31절)는 말씀이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그만큼 ‘구원’이 절박했던 시절이었다. 믿으면 집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진짜 믿었다. 그리고 진짜, 그 믿음대로 이뤄졌다. 박 장로는 기도원에 갔다가 하나님을 만난 체험을 책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찬양을 하는데 그날따라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강한 체 하려고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던 내가 통곡하듯이 울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내가 거기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다 쓰러진 초가집에 혼자 버려져있을 때도, 멀리서 어머니를 보고도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왔을 때도,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도, 험악한 서울역 생활을 하던 때도, 병든 몸으로 갔던 탄광촌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 모래사막 한가운데에서도, 일곱식구가 살던 9평짜리 좁은 집에서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주님도 그때 거기 함께 계셨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날부터 모든 것이 달라보였습니다. 발걸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주변의 나무와 새들도 새롭게 보였습니다. 밤하늘의 달도 다르게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얼굴도 천사로 보였습니다.’

50이라는 나이에, 박 장로와 안 권사 부부는 고입검정고시와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빵빵학번’으로 김천대 안경공학과에 입학했다. 50대 캠퍼스 부부커플은 학교에서 단연 화제였다. 이들이 개업한 안경원도 나날이 번창했다. 처음 교회를 다닐 적부터 맘에 와닿았던 그 말씀처럼, 주 예수를 믿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은 증거들을 눈으로 보며 살았다.

“장로님이 여행을 원래 좋아하세요. 그래서 장로님께 어차피 산과 들로 가는 것을 좋아하니, 버스를 사서 고아원이나 어려운 곳에 찾아가며 안경을 해주면 여행도 하고 봉사도 하고 좋지 않냐고 말했죠. 그랬더니 자기도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중부고속도로가 많이 막혀서 아예 이천에 집을 사서 ‘큰빛부부안경선교회’라고 간판도 달고 전국을 다니며 어려운 분들에게 안경을 해드렸어요.”

소록도에서 만난 86세 할머니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30센티미터 앞 밖에 못 보며 살던 할머니가 안경을 쓰자 외쳤다. “사람이 보여요!” 할머니도 울고, 60넘은 아들도 울고, 모두 울었다. 안경이 자식보다 낫다며 기뻐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의 기적이 이들 부부의 헌신을 통해 21세기에 일어난 것이다.

이들의 봉사는 마음의 눈도 뜨게 했다. 교회에서 안경이 필요한 분들을 미리 접수 받아 정해진 날짜에 오라고 한다. 그 날짜에 버스가 가서 시력검사를 해주고 돌아와 그 주간에 안경을 맞춰 교회로 보내준다. 교회에서는 주일날 그 사람들을 오게 해서 ‘복음’을 듣게 하고 나눠준다. 이런 과정 속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분들도 많다고 한다. 그렇게 지구 두바퀴를 돌며 2만개가 넘는 안경을 나누었던 안경버스가 올해 3월에 멈췄다.

▲ 암으로 투병하며 세상을 떠나기 두달전까지도 아픈 몸을 이끌고 봉사현장에 나갔던 박 장로의 마지막 봉사 모습.

장기기증, 모두 주고 떠나다

“장로님이 작년 구정 때 병원에서 위암 판정을 받았어요. 참 많이 놀라고 황당했죠. 그래도 항암치료를 7번 받은 후 암이 안보인다고 수술도 하고 잘 끝났거든요. 그래서 소망을 가졌는데…. 8월 26일 새벽에 혼수상태에 빠지더라고요. 제가 주여, 주여, 하니까, 장로님이 아멘, 아멘,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입원하셔서 9월 2일 돌아가셨어요.”

장로님의 유언은 ‘아멘’이 되었다. 숨지기 얼마 전인 4월에도, 6월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안경선교를 나갔다. 사랑에 굶주리며 이를 악물고 자랄 수밖에 없었던 그는, 마지막까지 사랑을 풍성하게 베풀고 갔다. 약속대로 몸까지 시신기증으로 내놓았다. ‘주인’을 잃은 안경버스만이 이천 집의 마당에 외롭게 서있다. 이 버스가 다시 굴러갈 수 있을까?

“재료도 아직 많이 있어서 버스만 누가 운전하면 되는데, 다행이 아들이 한 달에 한번은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해서, 새해에는 아들과 함께 안경버스를 타고 또 봉사를 나가려고 합니다.”

아들 박영모 목사는 박 장로가 생전에 그렇게 사랑했던 아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총신대를 수석 졸업, 미국에서 유학중에 아버지의 별세로 귀국했다. 그 아들이 아버지가 붙잡았던 핸들을 다시 붙잡는다. 생전에 그렇게 박 장로가 좋아했던 소리가 다시 우렁차게 새벽을 깨울 날이 다가온다.

‘부릉, 부릉, 부르르릉!’

▲ 아들 박영모 목사가 선한 삶으로 마친 아버지의 자리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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