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가도 달이 가도 평안한 ‘실버 목회자’의 천국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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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가도 달이 가도 평안한 ‘실버 목회자’의 천국 공동체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3.12.27 2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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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목회자들의 ‘복음자리’ 광명의 집을 가다
▲ 넓게 펼쳐진 저수지 위로 광명의집이 우뚝 서 있다.

수원역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다가 덕우리에서 내린다. 버스 정류장에서 덕머루서길로 들어서면 백구 한 마리가 행인을 반긴다. 한적한 길을 5분 정도 걷다 보면 조용한 시골 마을에 붉은 벽돌로 지은 ‘광명의 집’이 우뚝 서있다.

은퇴 목회자들이 살고 있는 이곳은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도시의 편리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뒤에는 아담한 밭과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옆에는 광활한 호수 같은 덕우저수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그 호수를 따라 옆으로 산책로가 이어진다. 소나무 숲이 우거져 여름에도 그늘 아래서 산책할 수 있다. 팔십이 넘은 어르신도 가뿐히 한바퀴 도는데 30분. 좀 더 정정한 분이면 길 건너 서봉산 산림욕장으로 간다.

70%가 은퇴 후 살 집이 없다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현직 목회자 열 명 중 7명이 은퇴 후 주거할 집이 없다고 한다. 따로 노후 준비가 없다는 대답도 50%가 넘는다. 목회자가 노후 문제에 대해 말하면 자칫 믿음 없는 자로 여겨지는 풍토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은퇴하는 순간 살 집이 없다. 다닐 교회도 마땅치 않다. 후배 목회자들의 눈치도 보인다. 은퇴하는 날부터 앞날이 어두워지는 목회자들에게, 이곳은 그래서 이름처럼 광명을 비추는 곳이다.

은퇴 목회자들에게 ‘복음’같은 이곳은 설립자 나광덕 장로와 관장 백형기 목사의 아름다운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농천교회를 34년 목회하고 자원 은퇴한 백형기 목사, 그리고 그 교회에서 청년시절부터 믿음생활을 하고 결혼해서 사업을 일으킨 나광덕 장로.

백형기 목사는 농천교회 시절부터 은퇴 목회자들을 정기적으로 모셔서 잘 대접하는 일을 기뻐했다. 여기엔 사연이 있었다. 백 목사는 늘 마음속에 존경하는 목회자상이었던 장인 정규태 목사가 은퇴한 후에 갈 곳이 없는 것을 보고 크게 상심했다. 그때부터 은퇴한 목회자들의 거처에 대한 꿈을 품게 된 것이다.

백 목사와 같은 꿈을 꾸게 된 나 장로는 수십억을 들여 ‘광명의 집’을 지었고 그 관장을 백 목사에게 맡겼다. 나 장로의 헌신에 기꺼이 승낙한 백 목사는 그후 “십원 한 장 허투루 쓰지 않으며” 광명의 집을 섬겨왔다.

▲ 광명의집
절 3채 지었던 집사님의 후원
집은 세웠지만, 그 다음 문제는 어떻게 후원을 받아 운영할 것인가 였다. 10주년을 앞둔 지금, 모두들 한입으로 감탄사처럼 고백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신기한 경로로 후원자들이 맺어진 일화가 한 두개가 아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 백형기 목사의 아내인 정신자 사모의 동생 정영자 권사가 몸을 다친 후 청담동 공원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우연히 같이 운동하는 박영진이란 사람을 만난다. 그녀는 절을 3개나 지었던 불교 신자.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미국 병원에 치료 받으러 입원했다. 그곳에서 교회 교인들이 열심히 심방와 주고 기도해 주고 위로해 주는 것에 감명을 받았고, 그 일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한국에 귀국한 박영진 집사는 약한 교회를 돕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바로 그 공원에서 정 권사를 만났고, 광명의 집 후원까지 연결된 것. 전혀 관계가 없었던 이곳에 수 천만 원을 후원했고 그 후 지금까지도 매달 적지 않은 후원금을 보내주고 있다. 박 집사의 아들 역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광명의 집을 방문한 후에 차를 기증했다.

이런 간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필요한 집기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뜻밖의 사람들이 후원자가 되었다. 첫해에 쌀을 사먹은 이후로 지금까지 쌀을 구입한 적이 없다. 생선이 먹고 싶으면 생선이, 고기를 먹고 싶으면 고기가 풍성하게 채워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납득이 간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평생 주님을 위해 헌신하다 백발이 된 목회자들이 여기 모여 있다. 하나님께서 후원자들에게 복 주시는 일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 김치를 함께 만들고 있는 모습
엄나무 순 뜯고 은행 열매 털고
광명의 집 안에 있는 광명교회 역시 남다른 ‘영성’을 보여준다. 예배에 참석하는 이곳 목회자 식구들은 약 20-30명이지만 외지에서 예배에 참석하러 오는 교인들이 꽤 많다. 주로 지식인 계층에 음악적 달란트를 가진 분들이 많다. 그래서 광명교회 예배의 찬양은 늘 흥에 넘치고 영에 감동한다. 흥미로운 건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 적응 못하고 방황하던 신자들도 이 교회에 오면 뿌리를 깊이 내린다는 사실.

담임목사인 윤길수 목사 부부도, 관장인 백형기 목사 부부도, 즐거움은 다른데 있지 않다. 사시사철 쑥 캐다가 쑥국, 바지락 캐다가 국 끓이고, 농사한 고구마, 감자, 고추로 반찬 더 하고, 봄이면 엄나무 순 뜯어다가 교인들 먹이고, 가을이면 은행열매 따다가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즐거움이다. 심심할 때 즈음이면 집으로 초대해 바비큐 파티를 벌이겠다는 교인들이 순번을 기다린다.

최고령자인 93세 이장식 박사(한신대 명예교수)부터 ‘어린’ 60대까지, 연령층은 다양하지만 눈빛만 봐도 통하는 게 있다. 이심전심, 목회자의 세월을 서로 잘 알기 때문이다. 한때 담임목사로서 강단에서 사자후를 토했던 목회자들이, 여기선 양같이 순한 교인들이 된다. 예배당에서, 식탁에서, 산책로에서, 호숫가에서 은발의 베테랑들이 은은히 짓는 미소를 이곳에서 발견할 때에, 인생의 뭉클함이 느껴진다.

▲ 산책로에서 기도하고 있는 원로목사
목회자에게 ‘은퇴’란 없다
너무 좋아 이 세상에선 상상할 수 없다는 천국, 아마 그곳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는 낙원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이곳에서 가장 많이 불리어지는 찬송은 천국 찬송, 그때마다 예배당은 후끈 달아오른다. 그동안 이곳에서 하늘나라로 가신 분이 9명이다.

어느 날 그 미소가 다시 보이지 않게 되고, 텅 빈 방 앞을 지나갈 때면, 인간적인 허망함도 가슴 깊이 스며든다. 그러나 더 좋은 천국에서 광명의 집 동창생으로 만날 것을 알기에, 감사함으로 이별할 수 있다.

영하의 날씨가 계속된다. 추운 날씨, 그러나 오히려 공기는 청명하다. 잔잔한 호수를 따라 산책로를 거닐며 하나님을 묵상하기 오히려 좋은 날씨다. 신록이 낙엽이 되고 죽은 나무가 다시 살아난다. 계절의 변화를 마음으로 보면서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곱씹으며 걷는 맛, 이곳의 기쁨이다.

오늘 아침도 원로 목사는 운동화를 신고 지팡이를 짚는다. 아침 산책이다. 한걸음 두걸음 떼며 지나온 세월을 반추해본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걷다 보면 의자 몇 개가 있는 쉼터가 나온다. 찬송은 기도로 바뀐다. 기도원이 따로 없다. 북한의 동포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자식을 위해, 세상을 위해 조용히 부르짖는다. 그 간절한 입김이 하얗게 하늘로 올라간다. 목사에겐, 오늘도 내일도, ‘은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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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당에 앉아 활짝 웃고 있는 설립자 나광덕 장로

“은퇴 후 걱정 없어야 더 열심히 목회할 수 있죠”

설립자 나광덕 장로, 김명희 권사의 소원

“원래 고아원을 생각했는데 백 목사님께서 조기 은퇴하시면서 은퇴 목사님들이 사실 갈 곳이 없다는 말씀을 듣고 사업의 일부를 정리해 이걸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2년 12월, 지금처럼 추운 겨울, 나 장로는 바로 이 터를 만났다. 벌써 6개월째 땅을 보러 다닌 결과였다. 아무데나 지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수원역에서 30분 이내, 버스 정류장에서 200m 이내라는 원칙이 있었다. 2004년 6월 본관이 처음 준공되었고, 운영관과 사택, 우촌관은 2008년에 준공됐다.

광명의 집은 깨끗하고 시설이 편리하다. 방마다 똑같은 세탁기, 냉장고, 침대가 잘 완비되어 있다. 입주자는 부담이 없을 뿐 아니라, 다른 방의 경제적 수준과 비교되지 않으니, 이것도 마음 편하다. 이유가 있다.

이곳에 부모님을 모시는 자녀들도, 그런 자녀들을 보는 부모님도 모두 편안한 마음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였다. 다만 “종종 사진을 찍기 위해 후원하러 오시는 분들이 이곳 시설이 너무 좋다보니, 후원할 수 없겠다고 말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본관을 마감할 시기에 사실 자금이 여의치 않았어요. 그때 김명희 권사 명의로 아파트가 하나 있었는데 제게 말도 없이 어느 날 그걸 팔아서 가져왔더라고요. 여기 보태서 마무리를 하라고요. 저는 참 고마웠지만 한편 맘이 안좋기도 했어요.”

나 장로는 거액을 들여 이곳을 설립했지만 즉시 소속 교단인 기장총회 복지재단에 기증했다. 혹시라도 사업이 잘못되어 이곳에 나쁜 영향을 미칠까봐 저어한 까닭이다. 설립자로서 자칫 목에 힘이 들어갈 수도 있을 텐데, 장로는 겸손해도 너무 겸손하다고, 주변에서 이구동성으로 칭찬한다. “나 장로님은 내가 업고 다니고 싶다”, “나 장로님 같은 분과 목회한다면 다시 한번 목회하고 싶다.” 이곳에서 늘 나 장로를 따라다니는 후렴구다.

“목사님, 사모님께서 평생 교회를 위해 헌신하셨는데 은퇴 후에 노후를 염려하시는 것은 참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 동안 고생하셨으니 노후에는 더 편하게 사셔야죠. 이곳이 그런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저 지역마다, 노회마다, 이런 목사님들의 안식처가 더 많이 생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들이 은퇴 후의 염려가 없으시니 얼마나 더 열심히 목회하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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