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은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대립에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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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은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대립에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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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2.1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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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레이아 평화조약(1648)

▲ 조병하 교수
종교개혁은 단순히 로마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종교적인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엄청난 사회, 정치적인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현대 유럽 국가들을 형성하였다. 1531년 2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에 서명한 자들은 황제와 로마 가톨릭의 군주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슈말칼덴동맹을 결성하게 되었다. 헷센의 필립이 중심에 섰고, 합스부르크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스트라스부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독일의 제국 도시들도 슈말칼덴동맹에 가담하였다.

이에 따라서 제국의 내부는 정치, 군사적으로 매우 심각해져서 향후 15년간의 독일의 종교개혁의 역사를 결정지었다. 종교개혁은 1530년대에 점차 새로운 지역으로 확산되어 지역별로 매우 다양하게 발전해 갔다. 군주들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이를 군주들의 개혁이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위로부터의 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물론 개혁을 수용한 것은 공동체 자체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는 교황과 트리엔트공의회를 협의하면서 루터가 죽은 1546년부터 슈말칼덴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전쟁은 1547년 프로테스탄트의 패배로 끝이 났다. 그러나 정치적인 혼란은 그에 따른 프로테스탄트교회에 대항하는 단호한 조처들을 방해하였다. 1552년 파싸우협정 이후에 제국 내에 두 신앙그룹들 사이에 무승부 상태가 이루어졌고, 1555년 아욱스부르크 신앙평화에서 실제적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신앙의 분포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바이에른을 포함한 지역들과 예수회의 영향으로 성직자 선제후들이 통치하는 지역들도 로마 가톨릭교회로 돌아가게 되었다. 16세기 말 신조주의의 형성과 더불어 유럽사회는 종교전쟁으로 치달았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극단적인 대립으로 1618년에 끔찍한 30년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전쟁은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독일 내에서 한편으로 합스부르크, 스페인, 프랑스와의 사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의 지역 제후권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중앙권력 사이에서 주도권 싸움이 심화 되었고, 여기에 덴마크와 스웨덴이 참여하게 되면서 전쟁은 매우 복잡하게 판도를 형성하였다.

1608년 다수의 루터파와 개혁파 영주들이 팔쯔의 프리드리히 4세를 중심으로 프로테스탄트 연합을 결성하였다. 원인은 엄격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작인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아누스가 프로테스탄트의 도시 도나우뵈르트를 합병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연합에 대응하여 막시밀리아누스와 몇몇 영주들이 1609년 가톨릭교회동맹 리가를 결성하였다. 전쟁의 동기는 합스부르크가 지역에서 일어났던 정치적인 혼란에서 기인한다. 무능하였던 황제 루돌프 2세의 통치에 군주들이 반발하였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더욱 진전된 자유를 얻어낼 수 있었으나, 황제의 증서에 대한 위반은 두 대립세력을 전쟁으로 이끌었다. 1618년 보헤미아의 군주들이 그들의 왕 마티아스에게 대항하였다. 1619년 왕이 죽자 그의 후계자를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팔쯔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황제 페르디난드 2세(1616-1637)는 스페인, 쿠어작센, 리가 동맹과 연합하여 전쟁을 일으켰고 승리하였다. 전쟁결과는 보헤미아가 강제로 다시 가톨릭화하였고, 암베르크와 오버팔쯔가 바이에른에 속하게 되고, 라인팔쯔가 가톨릭화하였다. 1623년 팔쯔의 선제후 직위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아누스에게 넘어갔다.

독일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위기는 덴마크의 개입을 불러왔으나 크리스챤 4세는 황제의 동맹에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1629년 뤼벡조약으로 그의 독일에 대한 간섭을 포기하도록 하였다. 황제 페르디난드는 1629년 반환칙령으로 1552년 이 후에 차지하였던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재산들을 되돌려 받고, 신앙의 자유를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1530)의 동류들’에게 국한 하였다. ‘개혁주의 자들’은 제외 되었다. 이러한 위기에서 독일 프로테스탄트교회를 건진 사람은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였다. 그는 1630년 7월 6일에 유럽주도권 싸움에 개입하였다. 비록 그가 1632년 뤼첸전투에서 전사하였으나 스페인 역시 1634년 뇌틀링엔에서 패배하면서 독일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세력이 약화되지는 않았다.

30년 동안의 전쟁에서 지친 독일, 프랑스, 스웨덴이 독일 뮌스터와 오스나부르크에서 오랜 협상 후 1648년 10월 24일에 베스트팔레이아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에는 신앙고백의 상태, 지역관계들, 제국의 헌법을 규정하였고, 1552년 파싸우조약과 1555년 아욱스부르크 신앙평화가 받아들여졌고, 루터교의 요청에 의하여 협약의 효력은 개혁교회에까지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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