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정당화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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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정당화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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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2.1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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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하라, 기도하라, 사고하라, 그리고 일하라 - 로크마커의 개혁주의 미학

▲ 안용주 목사
역사적으로 예술작품이 신비주의의 옷을 입고 인간의 운명을 그럴싸하게 조명하는 일이 많았다. 오늘날에 와서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이다. 로크마커는 이러한 예술의 예로, 독일의 마르크(Franz Marc: 1880-1916)의 작품 “동물들의 운명”(Tierschicksale)을 든다.

여기서 마르크는 사슴에게 인간이 상실해 가는 순수한 정신이 숨 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인간의 모습을 사슴에게 투사한다. 사슴을 통해 그는 절망적인 운명에 처해있는 인간상을 암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는 서구제국주의 열강을 중심으로 식민전쟁이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그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그 틈새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쓰러져가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목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의 파란 사슴은 인간의 올바른 심상을 상징한다. 이 사슴은 고개를 높이 들고 생명수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해 있다. 사슴의 생명이 물에 달려있지만 어디에서 목마름을 해소할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물질세계의 질서에 억압받는 빨간 사슴은 상처를 받은 듯 표정이 돌처럼 굳어있다. 현실의 퍽퍽함을 경험한 푸른 사슴은 이곳을 초월하고프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맘대로 할 수 없다.

사슴에게 “너희의 기쁨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여유가 조금도 없어 보인다. 그저 세상의 시류에 놀란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 어떤 종류의 자유의 여지도 그들에겐 전혀 없다. 사슴을 찌르듯 여러 층위의 결정(結晶)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구성엔 고통 속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이 투영되어 나타난다. 모든 존재는 고통의 연속이라는 마르크의 설명이 보여주듯 표현주의적 색채가 강한 그의 작품이 드러내는 것은 고통과 슬픔에 지나지 않는 인생에 대한 염세주의라고 로크마커는 판단한다.

▲ 프란츠 마르크, 동물들의 운명
로크마커도 인정하듯이 이러한 예술 태도는 물론 삶의 방식과 인간의 활동에 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이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통찰을 근거로 추구되었다 해도 구원의 진리를 간과했다는 사실이며 우주론적 신비주의를 표현했다 하더라도 초월적 하나님 안에서 추구되지 않았기에 의미의 한계를 표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로크마커는 모든 예술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미에서 출발해야 하며 예술의 존재 의의 역시 인간에게 예술과 미의식을 부여하는 것을 좋게 여기신 하나님의 의도에 합당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로크마커는 성경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예술 역시 신비의 대상도 무시의 대상도 아니라고 본다. 즉 예술은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표현하는 활동으로서 세속적인 행위로 평가절하 하거나 신비한 활동으로 미화시켜서도 안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은 정당화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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