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운동에 대항한 강력한 반종교개혁의 세력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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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운동에 대항한 강력한 반종교개혁의 세력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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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1.27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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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개혁과 반종교개혁

▲ 조병하 교수
종교개혁과 더불어 로마 가톨릭교회는 내부적으로 가톨릭교회의 개혁과 마르틴 루터의 출현으로 일어난 결정적인 사건들에 반하는 말로 “반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쓴다. 로마 가톨릭교회 개혁은 스페인과 이탈리아로부터의 충동으로 일어났다. 그 근원은 교회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던 스페인의 신비적인 경건이었다. 이를 대표하는 사람은 아빌라의 테레사(1515-1582) 이었다. 그녀는 신발을 신지 않았던 카르멜수녀원의 창시자이었다.

가톨릭교회의 개혁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수도원의 창설과 옛 수도원의 갱신운동으로 나타났다. 종교개혁 이전에 이미 스페인 지역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갱신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갱신운동과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탈리아에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1520년 이래로 이탈리아에서도 경건의 도약이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에서 스페인 개혁의 대변자는 한 삐에뜨로 카라파로 그는 교황의 대사로 오래 스페인에 머물렀고, 그는 후에 교황 파울루스 4세(1555-1559)가 되었다.
 
테아테의 주교였던 카라파는 1523-1527년에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 30-60여명의 성직자들과 더불어 신비주의-가톨릭 경건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기도모임’을 결성하였다. 1524년에는 테아테의 수도원을 설립하였고, 이러한 영향으로 1530, 40년대에 수많은 수도원들이 생겨났다. 매우 세속적이고 족벌주의적이었던 교황 파울루스 3세(1534-1549)도 이러한 개혁의 물결을 막아설 수는 없었다.

루터에 의하여 시작되었던 종교개혁은 독일과 스위스를 지나 알프스 넘어 밀라노까지 확산되어 나갔다. 당시 이탈리아의 프로렌스까지 독일제국에 속해 있었다. 프로테스탄트교회의 개혁운동에 대항한 강력한 반종교개혁의 세력은 예수회이었다. 스페인 사람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1491-1556)에 의하여 세워졌던 예수회는 정규사제들의 수도회였다. 이그나티우스는 1522년 몬세라트에서 하나님께 헌신하였다. 켐펜의 토마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으면서 만세라에서 참회의 기회를 가졌고, 내적 위기와 신비적인 깨달음을 경험하였다. 그는 1528년부터 1535년까지 파리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1534년 8월 15일 이그나티우스는 여섯 명의 동지들과 파리 몽마르뜨 언덕에서 거룩한 땅 팔레스타인 선교를 위하여 가난과 순결의 서약을 하였다. 그는 1540년 9월 27일에 교황 파울루스 3세에 의하여 교회의 군대의 통치자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1541년 최고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중심일과는 수도회를 이끄는 것이었다. 수많은 서신왕래를 통하여 수도회를 지도하였다. 그는 1556년 7월 31일에 로마에서 죽었고, 그가 거주해 왔던 로마는 예수회 최고위 사령관의 거주지가 되었다. 예수회에 들어가기 원하는 이들은 2년의 수련기를 거쳐

가난(청빈), 순결(동정), 복종의 서약을 해야 했다. 수도사가 된 이들은 15년 뒤 사제서품을 받았다. 또한 빠르면 45세에 서원 수도자의 단계에 이른다. 서원 수도자들은 교황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서약과 수도회의 핵심 구성원이 되었다.

밀라노까지 밀려오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종교개혁 세력을 막으려고 시도되었던 반종교개혁은 트리엔트회의(1545-1563)였다. 이 회의를 통하여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리와 개혁의 교서로 응답하였다. 이러한 교리와 개혁의 교서들은 근대 로마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열었다. 트리엔트의 의인론은 신앙과 공로의 중간에 섰고, 교회론의 원천으로 성경과 교회전승을 동등하게 규정하였다. 표준적인 성경본문은 라틴어 번역본(불가타)이었고,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오직 성경으로만!”에 성경, 전통과 교직으로 맞섰다. 그 밖에도 원죄, 연옥과 일곱 성례론에 대한 교황의 교서가 내려졌다.

본래 교황 파울루스 3세는 1536년 6월 2일에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요구로 공의회를 소집했었다.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지지하는 군주들과의 회의 장소 문제로 회의는 무산되었고, 수차례의 노력 끝에 1545년 12월 13일 트리엔트에서 공의회를 개회하였다. 그러나 공의회는 처음부터 냉혹하게 프로테스탄트교회에 적대적이었다. 공의회는 크게 세 번의 기간으로 대별된다. 가장 중요한 기간은 첫 번째 기간인 1545-1547년과 1549년에 있었다. 교황은 우선순위를 교리에 두었고, 황제는 우선순위를 교회개혁에 두었다. 8회의 회합이 있었고, 4회째 교회의 가르침의 근원들이 확정되었다.

1546년 4월 8일에 계시의 원천에 대한 교서 결의가 있었고, 구약의 경외경을 경전으로, 계시의 근원으로 성경과 전통이, 권위 있는 번역으로 라틴어 번역본이, 표준적인 성경의 해석자로 오직 교회가 있음을 결의 하였다. 5회에서 원죄의 문제가, 6회에서 ‘칭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로운 사람이 됨’의 교리가 결정되었다. 두 번째 기간은 교황 율리우스 3세 아래 1551년에 속개되었다. 세 번째 기간은 1562년 1월 13일부터 1563년 12월 4일까지 열렸다. 공의회주의자들과 교황주의자들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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