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스위스를 통해 전 유럽으로 확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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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은 스위스를 통해 전 유럽으로 확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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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0.29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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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 496주년 특별기고 (중) - 스위스 종교개혁의 역사와 특징
▲ 플랑드르의 판화 ‘칼뱅주의 시작(1566)’은 칼뱅주의자들이 카톨릭 교회의 상을 부수는 장면을 보여 준다. 칼뱅의 사상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으며, 그가 쓴 성서 소책자와 주석들은 널리 읽히고 연구되었다.

스위스 종교개혁, 전 유럽을 바꾸는 계기로
새로운 신앙운동으로 민주주의 제도 태동, 경제 발전 등 정착해

▲ 김재성 교수,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었다. 루터의 95개조항에서 촉발되었지만, 종교개혁의 완결판은 오히려 스위스를 통해서 전유럽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스위스는 유럽의 경제요충지로서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 주변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나 개신교 진영에서나 결코 다른 쪽에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스위스에서 개신교 종교개혁은 쯔빙글리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진행되었다. 1519년부터 쮜리히에서 신약성경을 강해하고, 군주 마크 로이스트와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서 혁신적으로 바꾸기 시작하였다. 쮜리히 시민들은 엄청나게 변화하는 종교개혁을 지지하였지만, 열 세 개로 나눠져 있던 자치 캔톤들 중에서 일곱 개 지역은 로마 가톨릭을 고수하고자 했다. 결국 1531년 카펠 전투에서 쯔빙글리는 로마 가톨릭군의 화살에 맞아서 사망하였다. 양쪽으로 나뉘어진 후에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키며, 대립하다가 18세기에 이르러서 진정되었다.

1618년부터 시작된 30년 전쟁 기간에도 스위스는 중립을 유지하면서 로마 가톨릭 진영과 개신교 진영 사이에서 정치적인 모색을 도모하기도 했다.

개신교의 확장
15세기 말까지, 대부분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풍부한 세금과 면죄부 판매 대금으로 풍족한 성직자들의 생활이 유지되고 있었다. 많은 성직자들이 충분히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였고, 대부분이 독신주의에서 벗어나서 첩을 두고 살았으니,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은 사라지고 있었다.

쯔빙글리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후에 성직자가 되었는데, 1516년부터 개혁적인 가르침을 선포하면서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쮜리히에 부름을 받은 후에는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쯔빙글리의 가르침에 호응을 보내자, 1523년 시의회에서 종교개혁의 수단들을 받아주기로 결정하였다.

쯔빙글리의 주도하에 쮜리히 시는 놀라운 변화를 시도하였다. 이미 로마 가톨릭 교회는 철저히 세속화 된 상태였었다. 성자숭배, 성인들의 유품숭배 등으로 미신적인 장식들과 유물들이 넘쳐났었다. 쯔빙글리는 로마 교회가 소유한 재산들을 시정부에 귀속시키는 한편, 성직자들의 생활비를 공급하도록 조치하였다. 점차 쮜리히의 영향을 받고 있던 주변 도시들도 이런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인트 갈렌에 이어서, 솨프하우젠에서는 요아킴 바디안이 종교개혁을 성공리에 이끌었다. 바젤에서는 외콜람파디우스가 선도에 섰다., 비엔나, 물하우스, 베른, 제네바 등에서도 종교개혁이 성공적이었다.

스위스 남서부는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으로,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그 중심지가 제네바였다. 여기에 프랑스 출신 기롬렐이 1520년대부터 종교개혁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1536년 여름 요한 칼빈이 도착하기 직전에 제네바가 종교개혁으로 돌아섰다. 같은 해에 베른에서도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제네바에서는 종교개혁을 받아들였지만 아직까지도 칼빈이 제시하는 새로운 교회질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1538년, 칼빈과 파렐은 추방을 당하고 도시는 혼란에 있다가, 다시 새로운 지도부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사역하던 칼빈을 초청하여 안정된 발전을 추진하였다. 1555년에 이르러서 칼빈의 엄격한 권징제도와 교회 질서가 정착되었는데, 이를 반대하는 자들은 도시를 떠났다.

스위스 개신교회의 공동된 신학사상
쯔빙글리는 바젤에서 에라스무스에게 배운 인문주의자였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루터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을 원하던 재세례파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 루터와 쯔빙글리는 1529년 말부르그 종교회의에서 서로 합일점을 찾는데 실패하였다. 이들 두 사람은 열 네 개 항목에서 일치하였는데도 단 하나 성만찬에서 서로 합의할 수 없었다. 루터는 성만찬 시에 빵과 포도주에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들어있다는 공재설을 주장하는 반면에, 쯔빙글리는 빵과 포도주는 단순히 상징이라고 맞섰다. 그리고 1531년 쯔빙글리가 사망하면서 라인강 남쪽 경계선 아래 스위스 내부의 종교개혁으로 한정되고 말았다.

쯔빙글리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가 쮜리히에서 활약하면서 스위스 진영 내부의 단합과 일치를 위해서 노력하였다. 특히 불링거는 남쪽에서 영향을 떨치던 칼빈주의자들과 타협하고 공동신앙을 고백하고자 하여 1549년에 칼빈과 함께 “협화신조”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칼빈과 함께 준비해오던 것들을 1566년 스위스 신앙고백서가 발표되었다. 이 고백서는 보헤미아, 헝가리, 폴란드, 네델란드, 스코틀랜드 등지에서 받아들여졌고,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와 함께 가르쳐졌다.

칼빈주의
원래 칼빈주의라는 말은 로마 가톨릭도 아니요, 루터파도 아닌 스위스 종교개혁 진영을 경멸하기 위해서 붙혀진 명칭이었다. 칼빈은 자신의 이름을 빈정거리는 사람들이 조롱하는 뜻으로 사용하던 이 명칭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칼빈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한 신학자를 높이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칼빈주의 원리가 퍼져나가면서, 영국에서는 장로교회가, 유럽에서는 개혁교회가 세워졌다.

칼빈은 프랑스에서 법학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탁월한 신학자로서 “기독교강요”라는 개신교 최고의 신학저술을 출판하였고, 성경해석서들과 신학논문집, 설교집으로 일약 유럽 전지역에서 명성을 얻었다. 종교개혁은 먼저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높이는 철저한 말씀 중심의 신학사상을 세워나갔다. 교회는 보이는 제도와 건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새롭게 규정되었다. 당회제도를 세워서 목사와 장로가 독립된 치리권을 행사하도록 전면 개편되었다. 성만찬은 말씀과 함께 성령을 통하여 임재하시고 교제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임을 강조하였다. 참된 교회는 순수한 말씀이 선포되고, 합당한 성례가 베풀어지며, 정당한 치리권이 시행되는 곳이라고 강조하였다.

유럽에 끼친 영향들
스위스 종교개혁은 전 유럽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신앙운동이 전 지역에 퍼져나가면서, 민주주의 제도의 태동과 경제적인 발전, 근면한 직업운동과 우수한 교육제도를 정착하게 된다.

제네바에서는 칼빈의 목회활동의 일환으로 병원과 은행이 세워졌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하듯이 섬기는 생활윤리를 정착시켰다. 훗날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사회경제 분석을 내놓을 정도로 변화된 세상이 만들어졌다. 선교와 전도에도 앞장서서 이웃 나라 프랑스의 개신교 성도들이 전개하는 “휴그노 운동”을 지원하면서, 목회자들을 지속적으로 파송하고 종교전쟁을 도왔다. 칼빈 이후 테오도르 베자가 영향력을 지속해 나가면서 재세례파와 급진주의자들과의 차별된 개신교회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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