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혼자 여기까지 온 줄 아니?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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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혼자 여기까지 온 줄 아니? 아니야’
  • <객원기자=이성원>
  • 승인 2013.10.23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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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맹인 예술가’의 감사 리스트 - 시각장애 클라리네티스트 이상재 교수의 고백

여기 수식어가 긴 사람이 있다. 그는 1급 시각장애자다. 그런데 클라리네티스트 프로연주자로 성공했다. 게다가 전임교수다. 그것도 시각장애와 어울리는 사회복지 계통이 아니라 예능계다. 미국에서 피바디 음대 150년 역사상 첫 시각장애인 박사로 족적을 찍고 왔다.

더 나아가 오케스트라까지 지휘한다. 국내 최초는 물론, 세계에서도 희귀한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 하트 체임버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2011년에는 그 유명한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서 공연을 했다. 600여명의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며 4차례 기립박수까지 받았다. 바로 시각장애 클라리네스트 이상재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편집자 주>

장애인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된 그는,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여정에 감사할 분들이 많다고 고백한다. 그의 감사 리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갈수록 세상살이가 팍팍하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긍정하게 된다.

눈이 되어주신 어머니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고향 경남 진해지 여좌동 동네, 계단 3개에 빨간 대문이며 흙길까지. 그날 숨바꼭질을 하던 7살짜리 상재는 도망가는 동네 형만 바라보고 냅다 뛰고 있었다. 그때였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던 차는 어린 소년을 몇 미터 허공에 날려버렸다. 아스팔트에 떨어진 소년이 꿈틀거렸다. 주변에서 아직 안 죽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가 7월 초여름. 거의 가루가 된 오른쪽 다리를 깁스하고 병원에서 한 달 만에 퇴원했다. 그러나 더 캄캄한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이 되었다. 사탕을 눈앞 가까이 대고 까고 있는 상재를 보며, 어머니는 가슴이 철렁했다. “왜, 잘 안보이냐?” 교통사고로 망막에 손상이 생긴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후 3년 동안 9번의 수술. 마지막 수술 때, 어머니는 의사 앞에서 울부짖었다. “저희 부부가 눈을 하나씩 주면 안됩니까….”

사고 난지 만 3년인 10살 7월, 그는 완전히 실명했다. 이제 시각장애인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때만 해도 점자책이 많지 않았다. 어머니는 일일이 책을 읽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주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양은 점점 많아졌다.

“음악사에 관한 책은 페이지가 1천 페이지예요. 그걸 어머니가 다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서 제게 보내신 겁니다. 말이 1천 페이지지, 그걸 다 녹음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카세트테이프가 수백개가 넘었어요.”
그가 눈을 잃은 이후, 어머니는 그의 눈이 되었다. 인생길의 모든 갈래마다, 어머니는 늘 그의 눈이었다.

악보를 찍어주신 선생님
음대를 가기로 마음 먹었지만, 개인레슨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받을 수 있었다. 집안 형편이 레슨 받을 만큼 넉넉하지 못했다. 그때 지금 재현중학교 음악교사로 있는 서기영 선생님이 그에게 레슨을 해주었다. 악보를 볼 수 없는 그에게 선생님이 악보가 되었다. 중앙대 음대를 들어간 후에도 선생님은 주말마다 집으로 찾아와 악보를 불러주었다.

“제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어요. 그러니 이제 악보를 불러주실 수 없잖아요. 전화로도 너무 비싸서 불러줄 수 없구요. 그랬는데,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내가 배워서 점자로 찍어줄게.”

유학가기 전 두 달, 선생님은 제자에게 점자를 배웠다. 그리고 6년 유학기간 내내 항공우편으로 점자로 만든 악보를 보내주었다. 그 분만이 아니다. 서울맹학교의 선생님들을 비롯한, 수많은 선생님들이, 그에겐 말 그대로 ‘은사’다.

생명 건져준 어느 행인
학력고사를 치르고 원서를 각 대학에 넣을 때였다. 연대도, 경희대도, 다른 대학들도, ‘맹인’이라고 아예 원서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중앙대를 갔더니, ‘서류접수야 못해줄 것 없지만’, 하면서 빈정거리는 투로 접수해주었다. 그때만 해도 특례입학이 없었다.

원서는 넣었지만, 불안과 분노가 마음속에 들끓었다. 그날 저녁 비슷한 처지의 시각장애 친구들과 모였다. 입학도 힘들고, 취업도 어렵고, 집에도 못가겠고, 그래서 뜻을 모았다. “야, 힘드니, 그냥 죽자.”

추운 겨울, 소주를 열댓병 사서 공원에 나갔다. 서로 소주를 병째 들고 물마시듯이 먹다 보니, 취기가 돌았다. 잠이 왔다. 서로 뒤엉켜 잠이 들며 말했다. “낼 아침엔 우리 다 죽는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살았다. 새벽에 큰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어떤 이가 이들을 살렸다. 개가 이상한 냄새를 맡고 주인을 끌고 와서 발견한 것이다. 경찰에 신고하고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인근 여관으로 데려갔다.

“여관에서 안받아주는 거예요. 눈 감은 사람들은 안받는데요. 그래서 그분이 자기 집으로 우리들을 데리고 갔어요. 단칸방에서 여동생을 내쫓더니, 우리를 재워줬어요. 몸을 좀 녹이라구요. 그분이 우리를 살려주신 것이죠.”

그런데 이름 끝자가 가물가물하다. 최태…. 여기까지다. 그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민을 가기 전, 다시 그를 찾아왔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함께 국수를 먹으며 남긴 말이 생각난다. ‘귀한 목숨이다.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야지.’ 이 ‘선한 사마리아인’을 찾고 있는데 아직 못만나고 있다.

인생을 바꿔준 교회
중학교 3학년, 평범한 아이들도 사춘기일 때다. 시각장애까지 있는 그는 질풍노도의 시절을 보냈다. 한번은 어느 봄날, 공원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 시비가 붙었다. 시끄럽다고 하는 비장애인들과 한판 붙고, 흉한 몰골로 터덜터덜 집에 가던 길이었다. 왠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왜 그러고 사냐. 어느 교회 가서 3개월만 기도하면 눈 뜬다.’

그 말을, 진짜 믿었다. 그날부터 신통하다는 그 교회 철야기도회를 한주도 빠짐없이 다녔다.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간절히 기도했다. ‘눈만 뜨게 해주신다면….’ 그러나 겨울방학 직전이 되어도 눈은 여전했다. 사기 당했구나! 그 할머니가 거짓말 했구나.

“그 후론 누가 교회 가자고 하면 그 이야기 해주며 면박을 주었죠. 그런데 미국 유학시절에 어떤 집사님이 또 교회 가자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역시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죠. 교회 필요 없다구요, 제가 엄청 잘난 줄 알고 살았거든요.”그럴만 했다. 대학 때 ‘교회 안다니고도’ 4년 내내 수석 장학금을 받고 수석 졸업했다. 유학도 유학원의 도움 없이, 그저 동생이 비디오 찍고 그는 연주하고, 그 테이프 하나로 유명한 피바디 대학의 입학 허가를 따냈다. 그는 스스로 ‘난 대단한 놈’이라며,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런데 집사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비빔밥 먹으러 가자구요. 한국 음식 먹고 싶지 않냐? 매운 고추장에…. 그 말에 솔깃해지더라구요. 진짜 비빔밥 먹으러 갔어요.”

추수감사절이었다. 목사님이 이 피바디 음대 유학생에게 특송을 부탁했다. 무엇을 할까, 하다가 예전에 한참 불렀던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를 택했다.

특송을 앞두고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그날 내용은 ‘감사할 제목이 얼마나 많은가’였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이하의 말씀이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설교를 듣는데 갑자기 귀가 먹먹해지더라구요. 눈이 안보인지가, 그 당시 십몇 년이 되었는데, 갑자기 칼라 텔레비전 보듯, 지난 일이 다 선명하게 보이는 거예요. 교통사고 당했을 때부터 대학교 원서 안받아줘서 펑펑 울고, 학교 도움 청하지 않겠다고 각서 쓰고, 집에 와서 그지 같은 세상이라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던 모습까지, 다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서 마음에서 음성이 들려요. ‘내가 지금까지 너와 함께 있었어….’”

내가 지금까지 너와 함께 있었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여기까지 인도해왔는데, 왜 너는 그걸 모르니. 항상 너와 함께 있었는데, 왜 넌 그걸 모르니….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잘나서 모든 역경 극복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양복 위로 눈물이 툭, 툭, 떨어졌다. 앞에 나가 ‘괴로울 때 주의 얼굴 보라’를 연주할 때에는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날 그는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다. 완고하던 자아가 부서지면서, 그의 클라리넷 음색은 특별해졌다. 귀만 아니라 가슴까지 조용히 울려 들어왔다.

늘 함께하는 가족과 친구
그의 감사 리스트는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미모의 아내와 사랑하는 딸 지윤(13), 정윤(10)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지금 시각장애 오케스트라 ‘하트 체임버’를 이끌고 있다. 실력과 감동은 최고지만, 하루에도 12번씩 그만 둘까를 생각할 만큼, 경제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감사의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다. 이제 그에겐 또 다른 길벗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시각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더 많은 비장애인들에겐 보람을 나눠주는 ‘협연’을 누군가와 함께 지휘하고 싶다. <객원기자=이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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