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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에 들어가며
  • 승인 2003.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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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3일은 대한제국 때 조선인 102명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이역만리 미국땅 하와이에 도착한 지 꼭 1백년이 되는 날이다.

하와이에 첫 발을 디딘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후 꼭 1백년이 지난 오늘, 미국 전역에는 1백만 명의 교인과 3천여 개의 한인교회가 세워졌다.

하와이에서 초라하게 시작한 미주이민은 현재 미 전역으로 확대되어 정치, 사회, 경제 등 미국의 모든 방면에 크게 기여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한인교회는 한인들에게 신앙적 안정감은 물론 민족적, 정신적 자부심과 현실 적응 능력을 키워 주었다.

지금도 한인 이민교회는 세대간의 갈등, 한민족간의 분열 등 또 다른 형태에서 헌신을 요구받고 있다. 한인교회는 이민자들의 슬픔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극복해 나가도록 도와주면서 시대적 요구를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고 있다.

본지는 3회에 걸쳐 (상)미주 한인 교회의 역사적 발자취, (중)열악한 환경 속에 한인들의 믿음을 지켜준 한인교회, (하)미주한인 선교의 나아가야 할 방향과 과제에 대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오직예수’ 믿음갖고 타향살이 극복 미주 한인교회의 역사적 발자춰<상> 청명한 하늘에서 깨끗한 공기를 타고 뻗어 내려온 햇살은 하와이 주민들에게는 사철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자연의 축복이기도 했다. 그러나 1백년 전 하와이의 햇살은 고향을 떠나 사탕수수 농장으로 들어온 한인 노동자들의 고단한 등짝을 태우던 땡볕이었을 것이다.

지난 3일, 1백년 전 초기 미주 이민자들의 신앙의 발자취를 찾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비행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10시간의 비행으로만 갈 수 있는 먼 이국땅이었다.

그러나 백년 전 102명의 한인들이 3주에 걸쳐 태평양의 거친 파도를 이기고 도착한 것과 비교해보면 편안한 여행이었다. 초기 한인들이 낮선 땅에 대한 두려움과 높은 파도를 신앙으로 극복하기 위해 예배를 드렸던 모습과 달리 기내에서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무료한 시간을 보낸 무미건조한 여정이었다.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어느덧 시간 분계선을 넘어섰다. 월요일 오전 10시에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다시 월요일 0시로 돌아갔다. 14시간을 더 사는 느낌이다. 초기 한인들은 시간 분계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피부색이 다른 동양인의 신분으로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했던 초기 한인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부자가 되겠다는 희망에 젖어 있었을까? 아니면 이국땅에서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을까?

이런저런 궁금증을 뒤로 한 채 신선한 바람이 낮선 이방인을 맞이했다. 이른 아침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이 긴장된 나그네의 마음을 녹여줬다. 하와이는 하루에 3계절의 날씨를 보여주고 있단다. 아침은 봄이고, 한낮은 여름, 저녁은 가을. 일년 내내 3계절이 함께 공존하는 하와이.

도착하자마자 일행은 미주 한인 역사와 함께 숨쉬면서 한인의 슬픔역사와 기쁨역사를 간직한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에 방문했다.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으로 취업이민 온 한인들 중 호놀룰루에 머물고 있던 인천 내리교회 권사이며 이민 첫배의 통역으로 온 안정수와 개성 남부교회 교인이었던 우병길이 1903년 11월 첫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다.

이 교회는 1백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훈련된 제자들을 양육하여 하와이 사회 모든 영역에서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담당해 왔으며 현재 8백명의 교인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하와이 이민 교회는 영적으로 고갈된 상태다. 80여개의 한인 교회가 있지만 2~3개의 교회를 제외한 나머지 교회는 재정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대부분 한인 교회들이 미국인 교회를 임대하여 주일 예배를 간신히 드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현재 하와이에는 성도들의 신앙성숙을 도와주는 변변한 ꡐ기도원ꡑ 하나 없다. 5만명의 한인 가운데 기독교인은 3천5백 명 수준.

현지 목회자인 하와이 안디옥 침례교회 우동식목사는 ꡒ백인, 원주민, 일본계, 필리핀, 중국 등 다양한 민족이 자신의 무속신앙을 믿고 있어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ꡓ라며 하와이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당부했다. 초기 한인 이민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시작된 것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결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슬픈 결과를 뒤로 한 채 일행은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서 있는 ꡐ한인기독교회ꡑ를 찾아갔다.

이승만 박사 기념관은 처음 만나는 관광객에게 ꡒ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ꡓ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시는 조국을 잃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젠 이승만 박사 동상만 덩그렁 남아있는 한인기독교회는 해외 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되면서 독립운동의 진원지로서 역할을 감당했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하와이 한인사회를 갈라놓은 화근이기도 했다.

하와이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이승만과 박용만의 ꡐ비운의 우정ꡑ이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물론이고 이후 한인사회가 양분되는 계기가 됐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을 때 만나 의형제를 맺은 이승만과 박용만은 각각 1913년과 1912년 당시 미주 전역에서 가장 많은 동포가 거주하던 하와이에 넘어왔다.

이승만은 교육과 잡지 발간, 교회 설립 등에 매진했고 박용만은 국민회 기관지인 국민보의 주필로 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독립운동 노선에서 틈새를 보이며 벌어졌다. 이같은 지도자간의 노선 갈등이라든지 인간적인 반목으로 인해서 파생된 불행한 역사는 지금까지도 뿌리 깊게 남아있었다.

여행자의 발길은 선교대회가 열리는 호놀룰루 시민회관인 NBC홀 향했다. 하와이 이민 백년을 평가하고 하와이 복음화 미주 이민 선교에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히며 개최된 선교대회.

5천여명의 한인 목회자와 성도들이 참석, 한민족의 세계선교에 대한 열정을 맘껏 표현했다. 이처럼 성장하기까지 미주 한인 이민의 역사는 제 1차, 2차, 3차에 걸쳐 성장해 왔었다. 1차는 1903~1945년이고 2차는 1946~1964년이고, 제3차는 1965년 이후 현재에 이른다.

제 1차는 한국의 어려운 정치, 경제 사회적인 여건으로 인해 7천여명의 이민자들이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에 일하러 이민을 왔고 이를 이어 1천여명의 사진 신부들이 이민을 왔다. 제 2차는 한국전쟁 이후 6천여명의 미국 군인과 결혼한 여성들과 5천여명의 고아들이 입양되어 왔고 후에 6천여명의 유학생들이 공부를 위해 유학왔다.

제 3차는 비로서 자발적인 가족들의 이민이 시작되었는데 그 수는 수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한인 이민사의 전환점이 된 1968년 이래 이민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한인 이민자들의 수가 증가함과 동시에 한인교회의 수가 급증했다. 한인 이민자들 중에 약 65% 내지 70%가 이민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이는 이민교회가 한국적인 가치와 문화와 언어 등이 고스란히 보존되어있고 정기적으로 회합할 수 있는 ꡐ한인센터ꡑ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선교대회 현장에서 만난 미주 한인교회 목회자들도 이같은 결과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제는 이중 문화에 익숙하고 영어에 능통한 1.5세와 2세 선교사들이 세계 방방곡곡에서 힘차게 사역하고 있다고 선교대회 참석자들은 증언했다. 그러면서 한인교회는 희망이 있다고. 하나님의 선택된 선민이 되기 위해 본국의 교회와 함께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와이-송영락기자(ysong@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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