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사건이 독일의 사건·중세의 사건이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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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사건이 독일의 사건·중세의 사건이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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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7.25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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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하 교수의 풀어쓰는 이야기 교회사 (48)

독일의 사건: 루터의 종교개혁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 백석대 역사신학

앞선 개혁자들이 개혁을 성공할 수 없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가 종교개혁에 성공하고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루터의 사건이 독일의 사건이었고 중세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이코 오버만은 주장한다. 오버만의 중세의 사건이었다고 주장한 내용들은 앞에서 쓴 ‘종교개혁이전의 종교개혁’과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에서 충분히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독일의 사건이었던 이유를 그의 주장을 바탕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당시 주어지 정치적인 상황들이 봉건 군주사회에서 계약국가로 발전하면서 ‘하찮은 수도사의 일’이 독일의 사건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작센의 선제후 현인 프리드리히는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제후들의 주권에 대한 교황청의 지속되는 간섭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일에 앞장섰었다. 1518년 여름 신성로마제국의 제국의회가아욱스부르크에서 열렸다.

황제 막시밀리아누스 1세는 베니스와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오스만 투르크 족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헝가리를 구하고자 ‘십자군비 모금’을 허용하는 일을 위하여 모였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는 전쟁자금보다 루터의 일로 회의를 소진시켰다. 모금허락을 받기 위하여 참여했던 베니스 사절들은 ‘하찮은 수도사의 일’로 비난하였다. 이 회의 때에 마르틴 루터와 잉골슈탓트의 요한네스 엑크 사이에 사면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아욱스부르크 회의가 끝나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루터에 대한 교황청의 심문이 10월 12일부터 15일까지 추기경 카이에탄에 의해 있었다. 심문 후 카이에탄은 프리드리히에게 루터를 독일에서 추방하거나 로마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이미 루터가 논제를 내걸기 전부터 독일에서의 사면부 판매를 제한하고 있었다. 독일에서의 교회에 대한 군주의 수장권은 종교개혁의 시작에 영향을 주었다. 즉 프리드리히의 주권의식과 민족국가의식 때문에 요구를 거부하고 루터를 보내지 않았다.

또한 루터의 사건이 독일의 사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영향력이 갑자기 증대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만약 증대시키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루터의 개혁은 1520년 평범한 사건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오버만은 주장한다. 선제후의 영향력의 증대는 막시밀리아누스 황제의 서거와 그의 후계자를 선출하는 일이었다. 황제는 1519년 1월 12일에 오스트리아 벨스에서 죽었다. 그는 서거 한 해 전에 아욱스부르크에서 열렸던 제국의회에서 자신의 손자 칼을 후계자로 지명한 바 있었으나 이를 위한 선거운동의 과정에서 로마의 이단의 문제는 독일의 사건이 될 수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1360년에 제정된 ‘금인칙서 제국법’에 따라서 7인의 선제후들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이들 중 세 명은 성직을 가진 군주들로 마인쯔, 쾰른, 트리어의 대주교들이었고 나머지 네 명은 보헤미아, 팔쯔, 브란덴부르크, 작센의 세속 군주들이었다. 칼은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제외하고 나머지 선제후들을 선거 전날까지 금전으로 표를 매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에게 칼은 누이 카타리나와 자신의 후계자인 조카 요한네스 프리드리히와의 결혼 약속을 함으로써 지지를 약속받을 수 있었다.(물론 종교개혁의 진행과 함께 1525년 5월 이 약혼은 파혼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인 프리드리히는 칼로부터 독일백성들이 ‘아무도 (황제의) 심문 없이는 독일제국의 국외 추방에 처할 수 없다’는 황제의 공약을 1519년 6월에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선출까지 성공적으로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었던 교황은 이제 루터에 대한 정죄와 파문의 교서를 내렸다. “주여, 이제 일어나소서!”로 시작되는 교서는 루터가 그것을 수령한지 60일째 되는 날까지 자신이 정립한 신학을 취소하고 글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파문되도록 되어 있었다. 루터는 1520년 10월 10일에 그것을 받았고, 60일 째 되는 날인 12월 10일 비텐베르크성의 엘스터 문 앞에서 교황의 칙서와 교회법의 책을 불사름으로써 자신의 개혁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교황 레오 10세는 그를 1521년 1월 3일 출교하였다.

한편 루터는 1521년 3월 6일에 황제 칼이 서명한 보름스제국의회 초정장을 받게 되었다. 루터의 보름스 재판은 4월 17일에 있었고 루터는 자신의 책과 자신의 주장들을 취소하지 않았다. 루터가 1518년 가을에 로마로 인도되지 않고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심문받을 수 있었던 것은 황제의 공약에 따라 루터의 사건이 독일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보름스제국의회의 심문의 결과로 루터는 1521년 5월 28일에 황제가 서명한 칙령에 의해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독일 국외추방이 선언되었다.

현인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보름스에서 빼돌려 5월 4일부터 1522년 3월 1일까지 아이제나흐 인근 바르트부르크성에 융커 죄르크라는 죄수의 이름으로 보호, 감금하였다. 그 후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임종시까지 개혁을 지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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