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믿음의 산실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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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믿음의 산실 '독일'
  • 승인 2003.0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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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의 한국 식당에서 오랜만에 김치와 불고기를 곁들인 푸짐한 점심 식사로 배를 잔뜩 불린 우리는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를 향해 서서히 핸들을 돌렸다. 독일이 하나로 통일되기 전만 해도 동독 지역에 있었던 비텐베르크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한낱 꿈 속의 환상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필자는 서독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그 곳에 가보려고 시도했었지만 북한과의 관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전의 동백림 사건 때문이었는지 번번이 입국을 거절당했었다. 당시 서독과 베를린을 오가는 열차 안에서 엄청난 고압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과 예리한 눈초리로 쏘아보는 경비병 건너편에 아스라이 윤곽만 떠올랐던 비텐베르크는 화려했던 옛 명성을 접어둔 채 붉은 이념의 어둠 속에서 여린 숨을 가늘게 내쉬고 있었다.

독일인들만이 지닌 독특한 국민성
독일인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민족과는 판이하게 구별되는 독특한 국민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권위와 명령이라면 철칙인 것처럼 잘 지킨다. 법 앞에서는 그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으며 상관의 명령은 무조건 복종해야만 하는 것으로 안다.

독일 역사의 영원한 패륜아 히틀러가 독재의 칼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아데나워와 콜이 십 수년 이상을 수상 자리에 앉아 있었을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가부장적인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독일인의 유별난 국민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한 죄로 사형당했던 아히히만이 법정에 남겼던 최후의 진술은 “나는 다만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었다”는 것이었다. 전 국방장관 스트라우스가 교통을 위반했다가 입건되었던 일은 지금도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빅 이벤트였다.

한편 독일 사람들에게 있어서 칭호에 대한 집념은 거의 병적이라고 할만큼 강하고 끈질기다. 일단 박사 학위를 얻게 되면 독토르(Doctor)라는 명칭을 호적에 올리거나 문패에 적어 놓는 것은 물론이고 부를 때에도 ‘헤어 독토르 하커’(Herr Doctor Haacker)등의 경칭을 붙이게 된다. 만일 교수일 경우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맡지 않아도 프로페소르(Professor)라고 부르며, 수공업의 대가는 마이스터(Meister), 그 부인은 후라우(부인) 마이스터(Frau Meister)로 부른다.

이와 같이 칭호는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권위적 표상이며 독일인이 가장 존중하는 근면의 열매이기도 하다. 피라밋 형의 웅장하고 화려한 철학 체계를 완성한 헤겔의 나라답게 독일인은 아직도 카리스마적인 권위에 대한 향수가 몸 깊숙이 베어 있어 어느 곳에서든지 게르만족의 강렬한 체취를 발산하고 있다.

또한 독일은 의외적으로 지방색이 매우 강한 나라이다. 그들은 침이 마르도록 조국을 자랑하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은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바이에른 사람과 프로이센 사람이 만나면 서로를 향해 ‘꽁생원’, ‘얼간이’이라고 부르면서 깔보고 조롱하는 것은 어디에서든지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지방색을 두고 독일은 “민족적인 통일을 끝내 실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교회 종교세를 내는 기독교 국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전통적인 믿음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모범적인 기독교 국가이다. 얼마 전까지 독일 정치를 주도적으로 이끈 CDU(기독교 민주동맹), CSU(기독교 사회주의 동맹)에 기독교라는 말이 들어가 있을 정도를 기독교 없는 독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현재 독일에는 카톨릭이 45.2%, 개신교가 51.1%인데, 바이에른 지방에서는 카톨릭이, 북부지역은 개신교가 강하다. 그리고 기민당(CDU)에는 카톨릭이, 사민당(SPD)에는 개신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거의 모든 독일 국민은 태어날 때 세례를 받게 되는데, 세례를 받은 자는 교구에 등록되며 정부기관은 교회를 위한 특별세(종교세)를 징수한다. 이 세금을 내지 않으려면 공적인 수속을 거쳐 “무종교” 임을 표명해야만 한다. 무종교가 되면 취직이 어렵고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신부나 목사의 집례를 받지 못하게 된다.

독일 교회는 나치에 저항했던 유일한 지하 조직이었고 혼란에 처한 독일에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거대한 소망의 방주였다. 평소 기독교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아인슈타인은 “독일 교회는 가장 암울한 시대에 거인처럼 일어섰다”고 극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독일 교회는 지나치게 정치에 관여한다는 것과 교인수가 급격히 감소되어져 간다는 이중적인 심각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오늘날 그들에게 있어 루터의 종교 개혁과 같은 운동은 한낱 빛 바랜 교회사의 한 장에 기록되어져 있는 일종의 카톨릭 저항 운동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는 것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일에 대한 희비 섞인 상념들을 하나씩 기억의 장에서 꺼내가며 옛 동독의 고속도로를 한없이 달리다가 비텐베르크를 알리는 표지판이 멀리 보이자 그 동안 줄 곳 긴장된 표정을 지었던 운전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루터가 직접 지어 부른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힘차게 부르면서 도시 안으로 서서히 밀고 들어갔다. 언젠가 천국문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어떤 찬양의 노래를 불러야 할까? 분명히 그 때에 미래 가정법은 과거 직설법으로 바꿔질 것이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셨다”라고.

고영민목사(천안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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