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신앙운동 신도들은 영적 개혁 주도하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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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신앙운동 신도들은 영적 개혁 주도하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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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6.27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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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하 교수의 풀어쓰는 이야기 교회사 (43)

동방교회와 신비주의 신학 헤시키즘: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 백석대 역사신학
동로마제국을 비잔틴제국으로 부르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서부터다. 물론 ‘로마나, 즉 비잔틴 역사의 책들(전집)’이라고 이름 하여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1557년 아욱스부르크 도서관원이 된 히에로니무스 볼프에 의해서다.

동로마제국이 1453년 오스만 투르크족에 의하여 멸망당할 때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인들의 바실레이아’, ‘로마인 황제들의 제국’, ‘로마니아’라고 불렀다. 현대 비잔틴역사가인 게오르그 오스트로고르스키는 비잔틴제국이 로마의 국가제도, 그리스의 문화,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혼합되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대 비잔틴역사가들은 비잔틴제국에 대한 시대구분을 ‘후기 고대-초기 비잔틴제국시기’(3세기 후기 혹은 4세기 초기-7세기 중엽), ‘중기 비잔틴제국시기’(7세기 중엽-1204/1261), ‘후기 비잔틴제국시대’(1204/1261-1453)로 구별하여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동로마제국에서는 황제들이 교회에 깊이 관여하였고, 보편적인 교회는 총대주교들에 의하여 치리되었다. 비잔틴제국과 총대주교와 감독들로 조직되어졌던 교회 사이의 관계들이 매우 불명료할 때에, 비잔틴제국의 사회에 결코 줄어들지 않는 영향력을 끼쳤던 매우 많은 수도원들이 그리스도교의 외부세계의 위치를 고수하였다. 비잔틴제국 사회에서 수사생활은 두 가지 큰 유형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공동체 안에서 사는 수도사들의 유형과 다른 하나는 은둔 수사로 사는 형태의 수사들로 구별되었다. 은둔 수사 형태의 유형은 명상신앙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명상신앙운동으로 알려진 헤시키즘은 ‘정적/ 고요함’, ‘평온’, ‘침묵’, ‘고독/ 은둔’을 뜻하는 헬라어 헤시키아라는 말로부터 나왔다. 본래는 이 운동이 비잔틴제국 내의 한 형태로 알려졌으나 다른 동방교회들에게도 퍼지게 되었다. 명상신앙운동의 신도들은 사회의 영적인 개혁을 주도하는 자들이었다. 12세기부터 나타난 이러한 신앙운동은 14세기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개인적인 신비의 영성운동의 범위를 벗어나 비잔틴제국 안에서 교부전통에 근거한 영적인 부흥운동으로 발전 하였다. 이러한 헤시키즘의 신학은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1296/7-1359)에게서 완성을 보게 된다. 그의 신학은 헤시키즘의 실천에 이론적인 근거와 정당성을 제공하였다. 14세기 중엽이후에 헤시키즘의 모든 사상은 비잔틴제국의 정통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일반화되었다.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의 부모는 본래 소아시아 출신이었으나 오스만 투르크족의 침략으로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해 원로원 원로로서 안드로니코스 2세 황제궁정에서 생활하였고, 그레고리오스는 그곳에서 자랐다. 그레고리오스는 20세가 될 때까지 7학예(문법, 수사, 논리, 산술, 기하, 음악, 천문학)를 배웠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배웠으나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그리스도교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316년경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유명한 수도사들과 만나 수도사로서의 삶을 결심하게 된다. 그의 온 가족들과 함께 수사생활을 살기로 하고 그는 그의 세 형제들과 함께 아토스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다. 아토스 산은 14세기 비잔틴정교회의 수사생활운동의 중심지였다. 1325년경 투르크족의 침략으로 그는 데살로니키로 갔다. 그곳에서 이듬해에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베로이아 지역의 한 산에서 5년을 수사생활을 하였다. 한 주간의 5일은 온전히 헤시키즘의 전통을 따랐고 나머지 토요일과 주일을 형제들과 대화에 활용하였다. 1347년 그는 데살로니키의 대주교가 되었고, 1359년 그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헤시키즘의 궁극 목표는 하나님과의 일치이다. 헤시키아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고 방법이다. 헤시키즘은 초월적인 하나님과 신화(神化)를 ‘하나님의 본질과 에네르게이아’, ‘하나님의 본질과 신적인 빛’의 관계에서 말한다. 예로, 하나님 체험을 표현하기 위하여 변화산의 빛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은 이것을 주님의 재림을 선취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팔라마스는 ‘이성을 초월한 지식’을 말한다. 그리고 이 빛은 오늘도 무정념(아파테이아)에 도달하고, 순수하고 지성적인 기도를 통하여 깨끗하게 된 사람들에게 부분적으로 빛나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신화시켜서 우리들의 본성에 영광과 신적 광체를 주신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서 영원히 영광을 누리게 한다”고 주장한다.

팔라마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아는 주체와 알려지는 대상사이에 외적으로 있는 지식뿐만 아니라 ‘창조되지 않은 빛’ 안에서의 연합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에네르게이아에 참여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존재와 생명과 신화’를 갖게 된다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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