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르포] 100년을 향한 신앙 소록도 교회가 담아온 기독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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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르포] 100년을 향한 신앙 소록도 교회가 담아온 기독교 역사
  • 이덕형 기자
  • 승인 2013.02.06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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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섬’ 소록도를 가다 <하>

▲ 소록도로 출발하기 전 녹동항에서 바라본 일출모습. 1월 중순이면 해변 곳곳에서 떼 지어 날아다니는 철새 무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 가치 담긴 문화재 골고루 분포
일제시대 인물로 조명해본 소록도 신앙

소록도 교회 역사 보전 위해
오늘날 건물노후화·노령화 해결 숙제로 남아


새벽 6시 30분. 소록도 섬 전역에 일출 기운이 감돈다. 소록도로 출발하기 전 녹동항의 일출 모습. 1월 중순 아침 소록도 해변 곳곳에는 떼 지어 날아다니는 철새 무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감나무 밭이 넓게 펼쳐진 북성교회와 남성교회도 하루의 삶을 기도와 예배로 시작하는 7개 교회의 마당도 점점 햇볕에 물들기 시작한다. 섬 내 중앙공원에 있는 편백나무, 향나무, 종려나무, 치자나무에 따뜻한 기운이 맴돌 때쯤 찾아본 역사적 장소들. 소록공원과 문화재, 섬 곳곳에 펼쳐진 그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았다. <편집자 주>

▲ 가을이면 북성교회와 남성교회 인근에는 감이 많이 열린다. 사진은 남성교회 전경.

# 소록도 성도 이야기
“하루하루 삶이 가난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부모 형제 떠날 때 맨몸으로 나왔지 유산을 갖고 나온 건 아니잖아요. 변변한 복지시설도 없던 당시 변화는 김두영 목사가 부임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천우열 전도사는 “1960년대 전쟁 후 어려웠던 시절, 금식운동과 여 성도들의 삭발로 7개 교회를 세운 후 김두영 목사는 빈곤문제 해결을 위해 축산업 장려책에 힘썼다”고 전했다. 1962년 2월 부임해 1993년 원로목사로 추대될 때까지 31년 2개월 간 소록도를 섬긴 김 목사는 소록도 역사와 함께 한 목회자다.

“전쟁 후라 모두가 어려운 시기 김 목사는 가축을 기르고 채소를 재배하는 농ㆍ축산 장려 계획을 세웠고 실행했습니다. 나아가 1969년 ‘녹산리농업협동조합’으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소록도 내 7개 교회 건립 당시 목회사역을 펼쳤던 그는 성도들의 가난문제 해결을 위해 ‘축산업’을 장려 한 것 이외에도 먼 훗날 교회 운영을 위해 전도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다니며 소록도교회 자립을 위해 후원을 부탁했던 것이다. 1995년 향년 78세로 소천한 김두영 목사는 소록도교회 역사에 빠질 수 없는 인물로 기록돼 있다. 현재 그의 추모비는 소록 중앙교회 중앙에 김정복 목사 순교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목회자들의 열정과 함께 전해오는 소록도 성도들의 이야기도 주목해볼만 하다.

“2009년에 천국으로 가신 한 할아버지는 질병으로 손을 모두 잃었지만, 남은 손목으로 피아노 반주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는 소변주머니를 옆에 두고 찬송반주를 하셨죠.” 천우열 전도사는 시력을 잃은 성도들도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 기도했다고 전했다.

“질병으로 시력을 잃은 80명 정도의 성도들은 기도단을 만들어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보이지 않아 성경은 암송하며 기도했던 분들은 소록도 내에서 유명했습니다.” 여전도회에서 모은 헌금은 멀리 인도 교회 건립을 위해 전해졌다. 천국을 꿈꾸며 살아온 소록도 성도들의 신앙은 그렇게 이어져왔다.

▲ 철창이 설치된 감금실은 한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아 어둡다.

# 역사가 담긴 곳
김정복 목사의 기도굴과 7개 교회 이외에도 소록도에는 방문할만한 곳으로는 일제시대 건립된 △소록도중앙공원 △자혜의원 △감금실 △검시실 △소록도역사자료관이 있다. 섬 서쪽 북성교회 인근에 위치한 자혜의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립소록도병원 인근에 조성되어 도보로 쉽게 방문할 수 있다.

병원 뒤로 난 길을 따라 오르막길을 따라가 보면 좌측에는 소록도 주민의 삶을 그대로 담고 있는 소록도 역사자료관이 있고 우측에는 일제시대 한센병에 걸린 환자를 감금하고 검시한 건물을 만날 수 있다.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66호와 67호로 지정된 감금실과 검시실은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1935년 건립된 H자 모양의 감금실은 철창이 설치된 형무소 구조로 한 낮에도 실내는 어둡고 침침하다.

해부실로도 불린 검시실은 방 두 칸으로 나눠져 한쪽은 해부실 다른 곳은 영안실로 사용됐다. 사망한 환우들은 이곳을 거친 뒤 화장됐고, 납골당인 만령당에 안치됐다.

소록도자료 제1관과 2관에는 소록도의 △역사 △생활사 △사건과 인물 △병원현황 △한센병에 대해 보여주는 자료와 물품이 전시돼 있다. 전시품 중에는 몸이 불편한 주민들이 사용하던 단추끼우개, 개호밥, 주전자를 잘라 만든 냄비, 스푼과 포크, 의복, 솥들개, 재봉틀과 의약품, 의료기구 등이 전시돼 있다.

▲ 소록도 환우들의 염원을 담은 평화의 동산 구라탑은 소록중앙공원 내에서 만날 수 있다.

전시관을 나와 발길을 돌려 다시 오르막길을 걷다보면 중앙공원을 만날 수 있다. 1936년 12월 착공해 3년 4개월간 6만여 명의 환우를 강제 동원해 만든 이곳은 소록도 주변 섬에서 암석을 채취하고 일본ㆍ대만 등지에서 관상수를 반입해 조성했다. 공원에는 솔성 및 편백나무를 비롯해 향나무, 팽나무, 종려나무, 치자나무 등 관상수 100여 종이 있고, 섬 중앙에는 한하운 시인의 시 ‘보리피리’가 적힌 시비와 ‘한센병은 낫는다’는 문구가 적힌 탑이 조성돼 있다.

공원에서 벗어나 멀리 보이는 소록중앙교회를 향해 원을 그리며 걷다보면 성실중고등성경학교 교사를 만나게 된다.

1957년 소록도교회연합에서 기독교교역자를 양성한 교육시설인 이곳을 졸업한 학생은 뱃길따라 부산 영광신학교와 여수 한성신학교로 진학해 사역자의 길을 걸었다. 개교 후 1983년 23회 졸업생을 배출할 때까지 총 151명의 사역자를 배출한 이곳은 지금은 문을 닫았다. 하지만 폐교된 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 소록도교회연합은 이곳을 소록도교회 역사박물관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 소록도 기독교교역자의 산실은 성실중고등성경학교. 이곳은 1983년 폐교될 때까지 총 151명의 소록기독교역자를 배출해냈다.

# 흑과 백
섬 내에는 일제시대 흔적도 곳곳에 남아있다. 그 중 소록도 성도에게는 두 인물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다. 소록도 역사는 제2대 하나이 젠키치 원장과 제4대 수호 마사히데 원장을 대조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천우열 전도사는 제2대 하나이 젠키치 원장을 유대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 바사왕 고레스와 같은 존재로 묘사했다. 그는 섬 내 기독교를 허락해 일본 성결교단 다나까 신사부로 목사의 포교를 허락했고, 북성교회와 남성교회 건축을 비롯해 세례식, 성탄예배, 부활절예배를 최초로 허락한 인물이다. 그가 사망한 뒤 주민들은 그를 위한 공덕비를 세웠다.

암울했던 시기 소록도 내 최초로 신앙을 허락한 그에 대한 기록은 화정원장비로 남아 섬 동쪽 자혜의원 근처에 건립돼 있다.

“반일감정이 심하던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주민들이 비를 잠시 땅속에 묻어뒀다가 복원할 만큼 그를 추모하는 마음은 강했습니다. 반면 수호 마세히데 원장에 대한 감정은 최악이었습니다.” 천우열 전도사는 부임과 동시 대규모 확장 공사 및 신사참배와 수호원장 동상참배를 강요한 그에 대한 원성은 섬 내 가득했다고 묘사했다.

실제 김정복 목사 기도굴로 향하는 길을 포함해 당시 건립된 △신사 △원장관사 △선착장 △자혜의원 △식량창고로 향하는 비포장도로는 당시 주민들이 대부분 닦았다.

“신사참배와 자신의 동상 참배를 거절한 교인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예배는 당연히 금지됐죠. 교인들에게 매달 한 번 있는 신사 참배일은 죽을 만큼 구타당하는 날이었습니다.” 1942년 수호 마세히데 원장은 결국 주민 이춘상 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중앙공원 내 9.6미터 높이의 수호원장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이원상 시인의 보리피리 시비가 놓여있다.

“시가 쓰여진 암석은 일명 ‘죽어도 놓지 않을 돌’로 불립니다. 확장공사 당시 일제 관리가 바위위에 타고 섬 주민들이 선창에서부터 끌고 온 돌이죠. 줄을 놓으면 채찍에 맞아죽고 끌고 가면 바위에 치여 죽었다는 사연이 담겨있습니다.”

▲ 한동안 인구감소 문제로 장성교회는 1986년 4월, 서성교회는 1990년 7월에 각각 폐쇄됐다. 사진은 서성교회의 모습.

# 남은 과제
소록도 주민은 2011년 기준으로 640명. 마을인구의 평균 나이는 75세다. 그 중 많은 수가 기독교 성도들. 1960년대 주민이 4천6백여 명에 이른 것에 비하면 그 수는 반세기만에 불과 7분의 1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50여 년 전 성도들의 기도와 예배, 눈물과 피로 세웠던 7개 교회 중 2개는 인구 감소로 마을이 사라지며 지금은 문을 닫았다.

장성교회는 1986년 4월, 서성교회는 1990년 7월에 각각 폐쇄됐다. 서성교회는 그래도 현재 터만 남아 있는 장성교회에 비해 소록도교회 연합회에서 꾸준히 관리한 결과 건물만큼은 깨끗이 보존돼 있다.

김형욱 목사는 “예전보다는 주민이 많이 줄었지만 완치 후 전국 80여 개 시설로 나간 주민들이 노년이 되면 찾아오고 있어 현재 주민 수는 어느 정도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어려움이 있다면 1960년대 지어진 교회가 보수 없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성전과 사택은 건축공법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지어져 단열재 없이 벽돌에 벽지를 그대로 바른 경우도 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지난해 태풍 볼라벤이 상륙했을 때 지붕이 날아가는 가버린 경우도 있었다. 건물 노후화에 문제는 소록도교회연합이 당면한 숙제다. 김선호 담임목사는 문화재를 보존하는 심정으로 교회를 아끼는 길은 노후화되고 사라져가는 교회 유산을 보존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 녹동항에서 소록도까지의 거리는 1km 내외. 2009년 소록대교가 개통되기 전 소록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녹동항에서 하루에 얼마 없는 배편을 이용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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