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학문, 신들의 고향 '아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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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학문, 신들의 고향 '아덴'
  • 승인 2002.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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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덴, 그 곳에는 옛부터 온갖 학문과 종교, 사상을 머금고 성숙해간 찬란한 도시 문화가 꽃피워져 있었고 그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인류 최고의 지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지구촌에 민주주의(데모크라시)를 처음으로 소개한 독특한 민족이었고 그 이념을 화려하게 발전시켜 정의와 평등과 자유를 누린 자유의 시민이기도 했다.

그리스, 아니 고대 명칭인 헬라(Hella)에는 여러 개의 수식어구가 언제나 뒤따라 붙는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여전히 살아 숨쉬는 곳, 마라톤과 살라미스 전투에서 파사 침략군을 무찔러낸 용기와 집념의 도시, 피타고라스의 수학과 유끄리드의 기하학, 소포클레스의 연극,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이 지금까지 그 절대 효용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곳 등등.

그 밖의 세계 최대 걸작임을 자랑하는 수많은 건축물들과 조각품들은 일찍부터 헬라가 세계 문명의 요람 혹은 발원지라고 불리워져 온 것이 결코 우연이나 과장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미지와 낭만으로 셀레게 한 아테네
우리가 아테네시의 남쪽 구릉지에 자리 잡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올라간 것은 대낮의 불볕 햇살이 서편으로 조금씩 비켜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길가에 반듯하게 깔아놓은 대리석들과 산등성이에 널려있는 석회암 돌들은 오전 내내 찜통 더위에 시달려서였던지 사우나 방의 맥반석처럼 화끈한 열기를 사방으로 내뿜고 있었다.

비지땀을 쉴새없이 닦아내며 숨가쁘게 올라간 산 정상에는 웅장한 대리석 신전이 당장이라도 우리를 덮칠 듯이 위태롭게 굽어다 보고 있었다. 인류 문화재 제 1호 파르데논, 그 파란만장한 시공의 역사는 잠시 그 곳에서 숨을 멈추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아덴의 수호신인 아피네 여신을 위해 15년(B.C. 447∼432)동안 지었다는 세계 최대 신전들 중 하나인 파르데논은 이 땅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크게 부서지고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야만 했다.

한때 투르크는 이 곳을 마굿간으로 사용했는가 하면, 베네치아 인들은 건물 중심 부분을 폭파시켜 바깥 기둥 부분만 남아있게 하였다. 언젠가 그 깨어진 조각들을 대영 박물관과 루불 박물관에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결국 수호여신 아피네는 그녀의 도시 아덴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금과 상아로 꾸몄던 자신의 신상까지 부숴지고 마는 엄청난 수치를 당해야만 했다.

정복자들은 자신들의 신이 강하고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아테네 신들을 모욕하는 갖가지 행사들을 신전 안에서 거행하였다. 주후 52년경, 긴 여행과 전도 활동에 지친 사도 바울은 아덴의 한 거리 어귀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에 그는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큰 분노를 느꼈다(행17:16). 당시 아덴에는 3만 여개의 신상이 있었는데, 이것은 아덴의 인구보다도 훨씬 더 많은 숫자였다. 범사에 종교성이 많았던 헬라인들은 알지 못하는 신들까지 섬겼고 그것을 신화 이야기로 꾸며 기회있을 때마다 열띤 논쟁을 벌였다.

정치, 사회의 토론장 아고라 광장
더욱이 그들은 아크로폴리스 북쪽에 있는 아고라 광장(성경에는 “저자”)에서 할 일 없이 정치나 사회, 철학 등의 주제를 놓고 하루종일 토론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쉽사리 전도의 대상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의 시선이 갑자기 낯선 유대인에게로 쏠려졌다.

그리고는 그 유대인이 전하는 새로운 교와 사상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이 “새교”와 “이상한 것”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바울을 붙잡아 아레오바고로 끌고 갔다.

용사의 언덕이라고 불리운 아레오바고에는 30여명의 재판관들이 있어서 살인 사건을 비롯하여 공중도덕 문제 등에 대해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이 메부리코에 험상궂은 인상을 하고 있는 바울을 어떤 폭력사건이나 범죄행위에 연루된 죄인 정도로 취급하려고 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자랑스런 대선배는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비굴한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문체는 코이네 이전의 최고급 헬라어 수준이었고 그의 논리는 당대의 어느 수사학자들보다 더 질서정연하였으며 그의 호소력은 데모디우스도 감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는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70인역 역자들이 고심 끝에 히브리어 ‘엘로힘’의 대용어로 사용한 ‘데오스’(하나님)를 인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 동안 철학자들 사이에서 막연한 신 개념으로만 사용되었던 ‘데오스’는 만유를 지으신 천지의 주재 하나님이시라는 인격적인 뜻으로 바꿔지게 되었다.

흔히들 바울의 아덴 전도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고 평가한다. 그는 아덴에 이렇다 할 교회 하나 세우지 못했고 편지도 써보내지 못했으며 그 쓰라린 체험이 후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고전 2:2) 작정케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아덴에서의 전도가 큰 반응을 얻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행 17:34), 그것이 실패한 증거로 제시되는 것은 지나친 속단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현재 그리스의 국교가 기독교(희랍 정교회)이고 인구의 90%이상이 크리스챤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되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아덴의 옛 도시의 여러 신전들과 신도시의 수많은 교회들. 전혀 다른 두 얼굴의 도시 모습에서 우리는 일찍이 이 땅에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의 고통스런 신음소리와 환희에 찬 승리의 함성을 동시에 듣는다.

오 바울이여. 그대는 정녕 듣고 있는가. 저 아덴 시민의 한결같은 목소리를! “파울레, 폴리 에프하리스토” (바울, 정말로 감사해요).

고영민목사(천안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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