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직제의 근거는 사도직의 계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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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직제의 근거는 사도직의 계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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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10.11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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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하 교수의 풀어쓰는 이야기 교회사 (11)

                                          교회 직제의 발전

▲ 백석대 역사신학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시작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12사도들이 중심이 되었다. 물론 세 명의 기둥 같은 지도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그들의 구심점에 있었다.(행 2:14-42; 3:1 등) 헬레니스트들에 의하여 디아스포라의 중심인 회당 중심으로 선포된 복음으로 안디옥공동체와 여러 바울 공동체들이 놀랍게 성장해 가며 영향을 끼칠 때는 아직 뚜렷한 지역공동체들의 직제는 보이고 있지 않았다.

보통 예루살렘에서 구제의 불공평문제로 구제의 일을 위하여 세운 일곱 명도 알려진 것처럼 집사가 아니었다(행 21:8,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에서 “집사”라는 말이 원문에 없음).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재림에 대한 역사성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지속될 지역공동체의 체계적인 구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1세기 말에 지역공동체들은 “장로들” 혹은 “감독들”과 “집사들”이라는 이중의 직제가 보편적이었다. 이중의 직제를 보이고 있는 클레멘스는 그리스도교의 직제의 정당성을 창조의 질서에서 찾고 있다.

2세기로의 과도기에서 이중의 교회직제와 더불어 순회하는 교회 지도자들인 “사도들, 교사들, 예언자들의 직제”를 증거하고 있는 ‘12사도의 교훈’은 삼중의 직제를 제시하고 있는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의 글들보다 앞선다고 학자들은 직제의 발전에 근거하여 집필연대를 추정한다. ‘12사도의 교훈’에서는 유랑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지역 공동체들 안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때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유랑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적지 않게 지역 공동체들에서 지도자로써 신실성의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지역 공동체들은 자체의 안정된 지도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그나티우스의 글들에서 하나의 지역 공동체가 하나의 감독을 갖고 장로들과 집사들로 구성된 삼중의 교회직제의 발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군주제적인 감독직이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보편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중엽부터이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도교가 유대인들과 유대교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되면서 유대교 그늘에서 보호를 받던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 안에서 더 이상 보호받을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혼합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 이단들과 개혁성향의 마르키온과 복구성향의 몬타누스운동은 더욱 공동체들을 존폐의 위협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까닭에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들을 위한 강력한 지도자들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직제의 근거를 사도직의 계승에서 찾았다. 이를 입증하려고 감독의 리스트를 열거하였던 기록은 160/170년경의 헤게지프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의하면 135년 예루살렘이 폐쇄될 때까지 15명의 리스트가 제공되고 있다. 교회사가 에우세비오스는 이 시기 이후로 주어진 자료들에 근거하여 안디옥 교회의 초대 감독으로 에우오시오스, 2대에 이그나티우스를 들고, 로마 감독으로 초대 리누스, 2대 아넨크레투스, 3대에 클레멘스를 들고 있다.

군주제의 감독직은 고대교회의 참회제도를 감독이 인수하게 되면서 강화되었다. 4세기까지 절대적인 여향을 끼쳤던 세례 이후에 죽음에 이르는 죄인 “배교, 살인, 간음 및 간통”의 죄에 대한 회계의 규정이 218년경 로마 감독 칼리스토스가 “간음 및 간통”한 자들을 회개의 기회를 부여하고, 251년경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가 배교자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감독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사도직제 계승의 군주제 감독직은 3세기 고대 카톨릭교회의 선교의 척추요 심장이었다. 감독의 소재지가 자신의 선교영역이었다. 3세기에 성직의 서열화가 명백해졌다. 그리고 공동체들은 전담사역자의 생활비를 위하여 헌금의 필요성이 분명해졌고, 성경에서 헌금의 표준으로써 십일조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월고정급은 서열에 따라 차등지급 되었다. 이 시기에 감독의 전횡을 장로단이 제어할 수 있었다.

250년경 로마 교회는 감독 1인, 46명의 장로, 일곱 명의 집사들이 있었고 낮은 성직계급으로 일곱 명의 차부제, 42명의 시제, 그리고 귀신을 내쫓는 사람, 낭독자, 문지기를 합쳐서 52명, 또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1500명의 과부들이 있었다. 이에 근거하여 로마 시에 그리스도인들은 5~7만 명 정도를 헤아릴 수 있다.(대략 시민의 10%)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시리아의 지역 교회들을 중심으로 이전 교회법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여집사제도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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