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가 아닌 ‘기도’를 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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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가 아닌 ‘기도’를 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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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8.14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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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업 목사 (샘물기독학교 교장)

기도를 하고 싶어 어느 집회에 참석했다가 말로만 듣던 장면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다. “복을 받으려면 헌금을 하라”고 강요하면서 손 든 사람의 숫자를 헤아리는 장면이었다. 하나 둘 하면서 일곱까지 헤아리는 것을 듣다가 정말로 손드는 사람이 있는가 싶어 눈을 떠 보았더니 바로 내 앞에 있는 한 젊은 자매가 손을 들고 있었다.

서민들에게는 매우 큰 금액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복을 강매하는 듯 거듭하여 외치는 강사의 말을 들으며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문득, 라지쿠마르 히라니가 감독한 ‘세 얼간이’라는 인도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인도에서 천재들만 갈 수 있다는 일류 명문 대학인 ICE에서 성적이 나오는 날이 되면 학생들은 각자의 신에게 기도하기를 시작한다.

이 장면에 대한 해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늘은 성적 나오는 날! 신과 거래할 시간이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뱀 신, 어머니 소, 그리고 캠퍼스 내의 우상 앞에 절하며 코코넛과 우유와 100원을 각각 바치며 이번 시험만 패스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정말로 기도란 하나님과 거래하는 일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소위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시며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눅 11:2)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으로, 기도의 지침이다. 기도가 무엇이며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모델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기도하는 삶을 사셨을 뿐 아니라 기도에 대하여 많은 가르침을 베풀어주셨을 것이다. 그 모든 기도의 가르침 중 엑기스가 주기도문에 녹아있는 것이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내용 중 절반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며 절반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가 마무리된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하나님께 주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인간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인간을 위한 기도조차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자신의 목적과 욕망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기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과 거래하려 한다면,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정말로 받으실까. 예수님께서는 성도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선포하셨다(요 6:31~32).그렇다면 어떤 기도가 응답될 수 있을까? 기도 응답에 대한 전제는 명백하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요 15:7).

여기서 ‘거하다’는 의미는 나그네와 같이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사를 와서 산다’는 의미이다. 즉,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하나가 되어 살면, 우리는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고 응답받을 수 있다는 약속이다.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고귀한 목표이다.

이러한 삶은 평생토록 지속해 가야 할 성화의 과제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예수님 안에 산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이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며, 말씀이 내 안에 거한다는 것도 예수님의 눈높이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부르짖으며 주께 기도라도 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기도는 이런 점에서 닫혀 있는 기도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명으로 주신 고난의 잔을 옮겨달라는 기도를 예수님께서 드리셨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다(막 14:36).

왜냐하면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마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부하나님과의 단절이 가져다주는 성자 예수님의 고통이 그만큼 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절규하며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기도의 실제를 엿보게 된다. 누구든 자신의 삶의 언저리에서 고통과 단절과 위기가 찾아왔을 때 자신의 영혼을 부여잡고 부르짖으며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거래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인간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우리의 기도가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부르짖는 기도가 된다 할지라도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참 마음으로 간구하게 될 때 우리의 기도는 응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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