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딜리 광장에 오래 서 있으면 웬만한 런던 사람들은 거의 다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고린도야 말로 참으로 지중해 세계의 피카딜리 광장이었다. 일찌기 네로 황제는 고린도 만과 아에기나 만 사이의 길이 6km 정도 되는 암벽산을 뚫어 운하를 만듬으로써 남쪽으로 3백여 km를 돌아가야 하는 불필요한 수고를 덜려고 하였다. 그러나 착공한지 얼마 못 되어 네로가 죽으면서 이 야심에 찬 공사 계획은 중단되었고(A.D. 66) 그 후 19세기 말에 프랑스의 민간회사에 의해 마침내 고린도 운하가 완공되어졌다. 원래 일정에는 없었지만 우리 일행은 다리 입구에 차를 세운 후 폭 23m, 높이 70m, 수심 8m의 이 세계 최장의 토목 공사 현장을 놀란 눈으로 둘러 보았다.
이윽고 도착한 옛 코린티엔시스. 이전에도 여러 차례 다녀갔던 곳이지만 오늘따라 그 정경이 왠지 더 초라하고 썰렁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소리없이 덧 씌워져 가는 낡은 세월의 연륜 때문인지, 아니면 날로 눈부시게 발전해 가는 현대 문명에 대비되는 상대적 단순함 때문인지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사도 바울 당시 고린도시는 인구 약 60만 명이 거주하는 로마 제국에서 네 번째 큰 도시였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등이 정치와 문화의 중심 도시로 발전했다면 고린도시는 1세기 정도의 공백기를 거쳐 경제적으로 갑자기 부요해진 신흥 항구도시였다. 이로 말미암아 고린도에는 정치적 위엄과 세련된 교양보다는 물질적 부를 숭상하는 배금주의, 명예나 전통보다는 자신의 영예 만을 우선시하는 개인주의가 만연하였다. 더욱이 지중해 근처의 온갖 우상숭배를 다 받아들인 종교 혼합주의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음란한 성적 타락은 이미 그 한계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특히 고린도 산 언덕 위에 세워진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천여 명의 여사제들이 기거하면서 종교의식이라는 명목으로 공공연하게 매춘을 일삼았다. 그들은 밤만 되면 언덕 밑으로 내려가서 몸을 팔았기 때문에 “여간 부자가 아니면 고린도에 갈 수 없다”는 속담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후에는 고린도라는 말이 술취함과 방탕, 타락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 버렸을 정도였다. 이 타락하고 음란한 도시에 사도 바울이 들어간 것은 제2차 전도 여행시(A.D. 49~52)였다. 그는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고 나중에 이 교회에 두 차례 이상 편지를 써 보냈다. 고린도 주민들은 기독교 복음을 쉽게 받아들였지만 주변의 세속 문화의 영향을 받아 여러 문제점들을 야기시켰다. 아무리 옛 자리를 둘러보아도 그토록 화려했던 사치의 흔적이나 부요했던 영광의 자취는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없었다. 원형 경기장에서 투사들이 내쉬던 거친 숨소리나 밤거리에서 떠들썩거리며 손님을 유혹하던 여인들의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태양신을 섬겼던 아폴로 신전의 7개의 기둥과 에우리크레스의 대 목욕탕, 잔잔하게 물소리가 들리는 페이레네 샘, 프로펠레아의 주초에 새겨진 비문들이 쓸쓸하게 우리들을 맞이하였다. 오 고린도여, 바울이여, 아볼로여! 큰 소리로 외쳐 보았지만 희미한 메아리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사치와 허영의 도시 고린도는 정녕 그 역사의 한가닥 진실마저 폐허의 돌무더기 속에 영영 묻어 버리고 만 것인가! 고영민목사(천안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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