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와 허영 때문에 폐허 속에 묻힌 고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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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와 허영 때문에 폐허 속에 묻힌 고린도
  • 승인 2002.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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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같은 밤의 장막을 둘러치고 깊이 잠들어 버린 밧모섬, 새벽 2시에 선잠을 깬 우리 일행은 그리스 아테네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스칼라 항구에서 초조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그 날이 주일이어서 우리 모두는 선창가 어구에 모여 새벽 기도회 겸 주일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아마도 이 예배는 계시록이 기록되기 이전과 이후 밧모섬에서 이른 아침에 드려졌던 세계 최초의 역사적인 예배 사건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우렁찬 엔진 소리와 함께 8만 톤 급의 대형 훼리 여객선은 고요한 어둠의 적막을 뚫고 북쪽 방향으로 빠른 속력을 내며 달려 나아갔다. 이 검푸른 바다는 아세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줄기차게 뻗어 나가게 했던 선교의 길목이었고 사도 바울과 함께 유럽의 역사를 싣고 가던 문명의 뱃길이기도 했다.

그렇게 엄청난 역사적 사건들을 상세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바다는 여전히 그 깊이 만큼이나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테네 근교의 항구에 도착한 우리는 현지 한 식당에서 미리 준비해 온 김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북서편에 있는 고린도를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고린도가 옛 역사의 지평 위에 그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은 헬라의 도리아 인들이 이 땅에로 이주해 오면서부터이다. 몇차례의 영광과 수치 사이를 오가는 영욕의 역사 과정을 반복하다가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면서 새로운 건설자의 이름을 따서 고린티엔시스(Corinthiensis)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고린도라는 명칭 그 자체가 이 도시만이 겪어야만 했던 뼈아픈 형극의 역사를 한 마디로 표현해 주고 있다.

고린도는 지형적으로 유명한 도시가 될 여러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그리스 본토와 발칸 반도를 넘어 대유럽과 연결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지중해를 건너 아프리카와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에게 해에 속하는 고린도만이 있고 동쪽으로는 이오니아 해의 아에기나 만을 끼고 있다. 고린도를 통해 아데네의 수준 높은 학문과 지식이 스파르타와 베네치아, 로마 등지로 전해졌고 지중해의 온갖 문물들이 터키의 비단길을 거쳐 인도와 중국으로 옮겨져 갔다.

고린도 아고라 시장에는 아라비아의 향유, 베니게의 대추 야자 열매, 리비아의 상아, 바벨론의 주단, 길리기야의 산양 털, 루가오니아의 모직물 등이 활발하게 거래되었고 부르기아 등지에서 끌려온 노예들도 역시 중요한 거래 품목들 중의 하나였다. 사람들은 고린도를 “헬라의 다리” 혹은 “지중해의 사교장”이라고 불렀다.
피카딜리 광장에 오래 서 있으면 웬만한 런던 사람들은 거의 다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고린도야 말로 참으로 지중해 세계의 피카딜리 광장이었다.

일찌기 네로 황제는 고린도 만과 아에기나 만 사이의 길이 6km 정도 되는 암벽산을 뚫어 운하를 만듬으로써 남쪽으로 3백여 km를 돌아가야 하는 불필요한 수고를 덜려고 하였다. 그러나 착공한지 얼마 못 되어 네로가 죽으면서 이 야심에 찬 공사 계획은 중단되었고(A.D. 66) 그 후 19세기 말에 프랑스의 민간회사에 의해 마침내 고린도 운하가 완공되어졌다.

원래 일정에는 없었지만 우리 일행은 다리 입구에 차를 세운 후 폭 23m, 높이 70m, 수심 8m의 이 세계 최장의 토목 공사 현장을 놀란 눈으로 둘러 보았다.
이윽고 도착한 옛 코린티엔시스. 이전에도 여러 차례 다녀갔던 곳이지만 오늘따라 그 정경이 왠지 더 초라하고 썰렁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소리없이 덧 씌워져 가는 낡은 세월의 연륜 때문인지, 아니면 날로 눈부시게 발전해 가는 현대 문명에 대비되는 상대적 단순함 때문인지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사도 바울 당시 고린도시는 인구 약 60만 명이 거주하는 로마 제국에서 네 번째 큰 도시였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등이 정치와 문화의 중심 도시로 발전했다면 고린도시는 1세기 정도의 공백기를 거쳐 경제적으로 갑자기 부요해진 신흥 항구도시였다.

이로 말미암아 고린도에는 정치적 위엄과 세련된 교양보다는 물질적 부를 숭상하는 배금주의, 명예나 전통보다는 자신의 영예 만을 우선시하는 개인주의가 만연하였다. 더욱이 지중해 근처의 온갖 우상숭배를 다 받아들인 종교 혼합주의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음란한 성적 타락은 이미 그 한계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특히 고린도 산 언덕 위에 세워진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천여 명의 여사제들이 기거하면서 종교의식이라는 명목으로 공공연하게 매춘을 일삼았다. 그들은 밤만 되면 언덕 밑으로 내려가서 몸을 팔았기 때문에 “여간 부자가 아니면 고린도에 갈 수 없다”는 속담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후에는 고린도라는 말이 술취함과 방탕, 타락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 버렸을 정도였다.

이 타락하고 음란한 도시에 사도 바울이 들어간 것은 제2차 전도 여행시(A.D. 49~52)였다. 그는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고 나중에 이 교회에 두 차례 이상 편지를 써 보냈다. 고린도 주민들은 기독교 복음을 쉽게 받아들였지만 주변의 세속 문화의 영향을 받아 여러 문제점들을 야기시켰다.

아무리 옛 자리를 둘러보아도 그토록 화려했던 사치의 흔적이나 부요했던 영광의 자취는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없었다. 원형 경기장에서 투사들이 내쉬던 거친 숨소리나 밤거리에서 떠들썩거리며 손님을 유혹하던 여인들의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태양신을 섬겼던 아폴로 신전의 7개의 기둥과 에우리크레스의 대 목욕탕, 잔잔하게 물소리가 들리는 페이레네 샘, 프로펠레아의 주초에 새겨진 비문들이 쓸쓸하게 우리들을 맞이하였다. 오 고린도여, 바울이여, 아볼로여! 큰 소리로 외쳐 보았지만 희미한 메아리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사치와 허영의 도시 고린도는 정녕 그 역사의 한가닥 진실마저 폐허의 돌무더기 속에 영영 묻어 버리고 만 것인가!

고영민목사(천안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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