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음성을 들었던 계시와 환상의 '밧모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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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음성을 들었던 계시와 환상의 '밧모섬'
  • 승인 2002.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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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소아시아를 떠나는 날, 에베소의 하늘은 더없이 맑고 아름답게만 보였다. 별들은 온갖 보석들을 천정에 촘촘히 박아놓은 듯 밤새도록 반짝거렸고 쿠사다시 항구 해변가를 따라 길다랗게 켜진 가로등들은 에게 해의 푸른 물결을 환상적으로 비춰주고 있었다. 계시의 섬 밧모를 간다는 설레임 때문이었는지 평상시와는 달리 몇번이고 잠자리를 뒤척이면서 섬 사이를 헤매는 어설픈 꿈만 꾸다가 모닝 콜 소리에 번득 잠이 깨었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서둘러 밧모섬으로 가는 전셋배에 나른한 몸과 여행 짐들을 실었다. 점차 멀어져 가는 터키 해안을 바라보면서 잠시동안 나만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사도 바울과 복음 전도자들이 그토록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했던 저 소아시아, 갈라디아, 본도, 밤빌리아 그리고 갑바도기아,
그러나 그곳은 지금 5천여만 명이 알라를 신봉하는 모슬렘의 땅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유래와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관심을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관광객들을 상대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만든 조잡한 복제 유물들을 바라보면서 의미 모를 쓴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이 땅 위에서 복음이 패배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저 신앙의 불모지에도 언젠가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찾아오게 되리라 굳게 믿는다. 크고 작은 섬들 사이를 지그재그의 물살을 가르면서 다섯 시간 여를 헤쳐나가던 우리의 배는 어느 한 섬을 향해 일직선으로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드디어 저 멀리 안개 속에 어렴풋이 가려져 있던 한 폭의 그림 같은 밧모섬이 그 베일을 서서히 벗겨내면서 우리 앞으로 선뜻 다가왔다. 말로만 들어왔던 환상의 섬 밧모,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기록했었다는 계시록의 현장, 마치 희망봉을 발견했던 바르솔로뮤 디아스처럼 우리는 들뜬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면서 조심스럽게 계시의 땅을 밟았다.

1천9백 년 전 밧모섬에 끌려 왔던 사도 요한의 심정은 어떠했었을까? 그는 이 섬에 어떤 방식으로 계시를 받았으며 어떻게 그 내용들을 기록했었을까? 그는 얼마동안 이 섬에 머물렀고 침식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었을까?
계시 동굴에 이를 때까지 수많은 의문점들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맴도는 것이었다. 역사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사도 요한은 도미티아누스황제 때 96세의 노령으로 밧모섬에 끌려와 18개월 간(A.D. 96~97년 경) 채석장에서 강제 노동을 한 후 네르바 황제 때 귀양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되돌아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에베소에 있는 동안 청년들이 몰려와서 설교 부탁을 하면 그는 언제나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고 말했는데, 그 때 그의 얼굴은 마치 천사와 같았다고 한다. 계속해서 설교 부탁을 하면 요한은 역시 똑같은 대답을 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랑은 체험한 자만이 진정으로 느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랑하는’ 바로 그 제자였다. 한없이 부드러운 사랑,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랑, 끝까지 찾아주시고 감싸주시는 사랑, 그 엄청난 예수님의 사랑은 성급한 우뢰의 아들로 하여금 후에 온유한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하였다.

요한이 계시를 받았다는 동굴은 5평 남짓한 좁고 어둑컴컴한 방이었다. 동굴 안에는 사도 요한이 예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는 광경 등을 묘사한 프레스코 성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를 제자인 브로고로(일곱 집사 중 하나, 행 6:5)가 대필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동굴 한쪽 벽에는 요한이 손수 새겼다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천정에는 나팔 소리와 같은 예수님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갈라진 바위틈이 있다. 이 바위틈에 의해 동굴 천장은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이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안쪽 벽면 1m 높이에는 손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홈이 있는데, 그 주위에는 은으로 테를 둘러 놓고 있다. 이것은 요한이 기도한 후 일어날 때마다 붙잡고 일어나서 파인 자국으로 전해지고 있다. 노구의 몸을 이끌고 거친 숨소리를 내며 하늘의 계시를 받던 옛 선배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지막하게 몇 마디의 기도를 드리고 난 후 일정을 따라 호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정상에는 요새와 같이 붉은색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한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1088년 수도사 크리스토둘로스에 의해 세워진 이 수도원 안에는 희귀한 성경 사본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매장 첫 글자가 순금으로 쓰여지고 나머지는 은으로 쓴 마가복음서도 있다. 건물 밑에는 그리스정교회의 파티미안신학교가 있는데, 학교 건물 외벽이 흰색으로 되어 있는 것은 수도원의 붉은 색과 더불어 성만찬에서의 떡과 포도주를 연상시키기 위함이라고 한다.

하루 종일 밧모섬을 녹이기라도 하듯 뜨겁게 쏟아 붓던 태양의 열기는 멀리 서편으로 옮겨지면서 산과 바다를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저 오색의 구름벽들 사이로 한줄기 계시의 빛이 비춰올만도 한데 새벽녘에 그 섬을 떠나기까지 끝내 환상의 실오라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계시록의 마지막 구절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 예수를 기다리는 일 뿐이다.

고영민목사(천안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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