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받았다고? 나는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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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받았다고? 나는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2.02.1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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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회개’와 ‘용서’의 의미

김근태-이근안 관계 영화 ‘밀양’ 떠올라
신 앞에서 ‘회개’와 인간 사이 ‘용서’ 딜레마

기독교는 용서와 사랑의 종교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그를 믿고 회개하면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와 용서의 의미이다. 하지만 이 같은 기독교의 교리가 때로는 논쟁적이다. 최근 타계한 김근태 상임고문(보건복지부 전 장관)과 고문기술자 이근안 씨의 이야기는 이 같은 논쟁에 또다시 불을 붙였다.

2011년 문턱을 넘어가던 12월 30일. 민주통합당 김근태 상임고문이 향년 64세의 일기로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으로 별세했다. 서울대 65학번으로 입학해 반독재 민주화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김 상임고문은 1970~80년대 시국사건의 중심에 서서 수배와 투옥을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화운동의 투사였던 그의 죽음을 접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고문기술자로 유명한 이근안을 떠올렸다. 전 경기경찰청 공안분실장 이근안 씨는 김근태 상임고문을 비롯한 많은 민주화 인사들을 직접 고문했다. 이 씨는 1988년부터 고문혐의로 수배를 받아오다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하고 7년간 수감생활을 마친 후 2006년 출소했다. 이 씨는 수배를 피해 도망 다니던 중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자연스럽게 아버지 손때가 묻은 성경책에 손이 갔다. 이후 10년 동안 노트에 3천4백개가 넘는 성경 구절을 손으로 베껴 쓰며 공부했다. 자수를 결심한 것도 성경공부 덕분이었다. 요한일서 1장 9절을 읽으면서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결심이 섰다.”

이 씨는 옥중 편지를 통해 신학을 했다. 출소 후 2008년 모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씨는 복역 중인 2005년 면회를 통해 김근태 상임고문을 만났다. 그는 “김근태 장관과 만났을 때 사죄를 했다. 그도 ‘그게 개인의 잘못입니까. 시대가 만든 것이지’라며 사죄를 받아주셨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근태 상임고문과 가까웠던 사람들의 증언은 정반대다. 그의 부인 인재근 씨는 “교도소 면회 이후 남편은 며칠간 말을 안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하는데 용서를 못한다고 했다”며 “용서는 신의 영역이니 그것으로 마음에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조언을 했다”고 말했다. 민주통합당 이인영 의원은 “김 상임고문은 자신의 용서가 진실인지, 이근안 경감의 사죄가 진실인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김근태 상임고문과 이근안 씨의 이야기는 영화 ‘밀양’과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하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살인범은 ‘이미 주님께서 다 용서해주셨다’며 평안한 얼굴로 면회를 간 주인공 신애를 만난다. 그를 용서하기 위해 찾아갔던 신애는 더 큰 증오와 절망에 빠진다. 영화에서 신은 신애에게 아무런 죄가 없는 아들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 살인범을 용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왜 하나님이 먼저 그를 용서해주셨는가? 아직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뭔데, 왜 먼저 그를 용서하셨단 말인가?”

신애의 외침은 김근태 상임고문이 죽음 직전까지 이근안 씨를 용서하지 못한 이유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한다.

영화 ‘밀양’은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이야기’(1985)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회개와 용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청준 작가는 “인간의 구원이란 인간 사이의 용서를 구한 다음 이루어지며,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을 때에 마지막으로 신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윤리나 용서를 비껴가 막바로 신과 직면하면 비인간화가 일어난다”고 말했다.

사실 이근안 씨의 회개가 논쟁이 된 이유는 따로 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고문)할 것”이라며 “그 당시에는 그것이 애국이었다.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김근태 상임고문 별세 이후 이 씨의 회개, 목사안수 문제가 사회적 논란이 됐다. 이에 기독교계 단체들도 성명을 내고 목사 안수를 준 교단을 비판했다. 온라인에서도 이 씨에 대한 목사직 취소 청원 운동이 벌어졌다. 결국 해당 교단은 지난달 14일 긴급 임원회를 열고 논의 끝에 이 씨에 대한 목사 안수를 철회하고 목사직에서 면직시켰다. 인터뷰에서 과거 고문 행적에 대한 입장을 밝힌 내용이 결정적인 이유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기독교에서 ‘회개’는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된다. 구원은 한 개인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으며, 선행을 통한 구원을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오직 믿음’에 의해 완성된다. 이 때문에 종종 회개 이후 변하지 않는 삶이 논란이 된다.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1986)은 기독교적인 사랑의 의미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영화에서 악랄한 노예상이었지만 용서와 사랑의 신부가 된 멘도자가 그려진다. 자신의 종족을 잡아서 노예로 만들고, 동생까지 죽였던 멘도자를 복수와 증오가 아닌 용서로  사랑을 베풀었던 과라니족도 등장한다. 조건 없는 용서와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사랑의 힘은 이 영화를 더 감동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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