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의 안녕’ 추구하는 정치ㆍ평화신학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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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의 안녕’ 추구하는 정치ㆍ평화신학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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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2.14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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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동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국제투명성기구가 2011년 발표한 ‘국가별 부패인식지수’에서 한국은 2010년보다 4단계 떨어진 43위를 차지했다. OECD 34개국 중에서는 27위였다. 그만큼 한국사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 못지않게 한국 교회의 신뢰도지수는 위기의 상황까지 와 있다. 결국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향한 한국사회의 요구는 동시에 한국 교회의 갱신을 위한 요구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와 교회의 가치회복을 위한 기독교신학의 역할은 무엇일까. <편집자 주>

한국 교회가 사회에서의 신뢰도 지수는 굳이 재론하지 않더라도 부정적인 수준을 넘어 위기의 상황까지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신학이 한국사회의 가치회복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이중적 부담에 직면해 있다. 사회의 가치를 위해 기독교 자체의 갱신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과 한국사회의 가치회복에 대한 한국사회의 도덕성 회복이 급선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의 기독교신학은 재정향해야 한다.

첫째, 정치신학을 극복해야 한다. 기독교의 가치와 정치의 가치 사이의 혼돈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기독교적 가치와 정치의 가장 위험한 만남이라면 정치가 종교적 지향점을 목표로 삼든지, 반대로 종교가 그 목표를 정치와 혼동할 때이다. 그렇게 되면 정치가 현실적 조건 속에서 국민들을 위한 전략을 ‘기도’와 혼동하든지, 교회의 종교적 권위를 세상적인 ‘권력’과 동일시하는 착각을 범하게 된다.

정치는 정치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그 한계를 극복해야지 거기에 신앙을 운운하는 것은 잘못이다. 신앙은 그 권위의 근거를 하나님, 또는 최소한 교회 공동체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지, 세상 권력을 잣대로 들이대는 것은 착오이다.

정치와 신앙이 각각 세상적이거나 초월적인 문제를 차치하고, 관계 나름의 전리추구라는 측면에서 동일한 영역에 속한다고 할 때 제기되는 문제는 신앙이 근거하는 성서적 영감과 정치가 의지하는 현실적 수단들 사이에서 과연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적 분별력’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순종하는 사회적인 입장을 포기하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세상 속에서 진리와 보편적인 사랑을 획득하고, 인간의 유한성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둘째, 한국신학은 삼위일체 신학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한다. 한국의 사회적 가치 회복을 위해 신학적 관심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 영역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기 위함이다. 즉, 우리의 인간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사회적인 형상’을 발견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사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즉, 인간 공동체는 삼위일체의 형상이며 모든 인간은 이 삼위일체를 통해 하나님과 닮도록 초대받았다.

하나님의 본성이나 본질은 상호 인격적 과정, 즉 타자에 대한 인식이나 사랑에서 영속적인 성장을 하며, 위격들 자체가 사회적 과정에 있는 신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의 신학적 토대는 한국 사회의 가치회복을 위한 기준이 된다. 따라서 올바른 삼위일체 신학은 삶의 모든 차원에서 온전하기를 원하는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무엇보다 삼위일체 진리는 한국 사회 속에서 생명의 지속과 인간의 자유와 민주를 확장하도록 이끄는 기준이 된다.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 그리고 평화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생명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가 생명과 사랑으로 얽히는 침투, 만남, 연합의 과정이고, 이러한 생명과 연합이 인간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실현해 나아가는 영적 에너지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체험하고, 이 연합을 통해 한국 사회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평화신학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평화는 종교적이고 동시에 정치적 언어의 모어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 평화란 인간의 삶 속에서 성취되기 원하는 궁극적인 비전이며, 바람직한 정치적 상태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평화행동에는 생기가 넘치고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 행동은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비로우신 계획에 동참하도록 부르셨다’는 종교적 신념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를 위한 투쟁을 패배주의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평화는 창조적인 활동인 동시에 인간을 혁신하고 도전하게 만들어 결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것이다.

정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바꾸는 기독교의 신앙, 저 초월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한 흔적을 발견하는 사회, 그리고 구성원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사랑으로 연대하는 신학적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교회 공동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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