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첫 타문화권 선교 100년 역사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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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첫 타문화권 선교 100년 역사를 돌아보다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2.01.18 1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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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받은 지 28년 만에 '주는 선교'로 자립 전환

1912년 장로회 1회 총회에서 파송 결의, 이듬해 중국 산동성에 3명의 선교사 파송
전도국 헌금 모금하며 한국 교회의 힘으로 자립 선교... 평신도 의료 사역도 처음 시작


장로교 총회 설립 100주년을 맞이한 2012년은 선교계 역시 뜻 깊은 해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교회가 스스로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한 첫 해가 바로 1912년이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1912년 9월 장로교 총회를 창립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중국 산동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만장일치 결의했다. 선교비 마련을 위해 1912년과 1913년 두 해동안 전국 교회가 추수감사주일을 ‘선교주일’로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3년 총회에서 김영훈, 박태로, 사병순 목사를 첫 해외 선교사로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독노회가 설립된 지 불과 5년, 그리고 총회를 설립한 첫 해, 한국 교회는 ‘선교사 파송’이라는 결단을 내리며 그동안 받아왔던 해외 교회의 사랑을 되갚아 나갔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꼭 100년 만에 세계선교 2위의 강국으로 나타났다.

# 선교는 교회의 기본 사명

해외 선교에 앞서 한국 교회는 1907년 독노회를 설립하면서 7명의 목사를 세우고 그 중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를 이듬해 제주로 보냈다.

이기풍 목사가 한국 교회 첫 선교사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신대 이상규 교수는 “당시 독노회의 선교사 파송은 노회라는 치리회 조직과 함께 선교는 교회의 기본적인 사명이라는 점을 확인시키는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동족에 대한 영적 책임을 자각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렇게 1913년까지 동족에 대한 선교에 집중하던 한국 교회는 1912년 장로교 총회 조직 후 세계 선교에 대한 사명을 다짐한다.

한국 교회 첫 타문화권 선교로 여겨지는 산동성 선교사 파송은 어떻게 진행됐을까.

첫 선교는 비교적 체계적이었다. 산동 선교를 위해 총회는 중국현지를 답사하고 중국과 한국에 있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협의를 거쳤다고 한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인 만큼 신중을 기한 것이다. 당시 미 북장로교 선교사 헌트(한위렴)는 중국을 방문해 한국 선교사드의 파송과 사역 가능지역을 오랫동안 조사했고, 중국 교회의 지도자와 중국 내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을 만나 논의를 거쳤다.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1912년 장로교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중국 선교가 결정됐으며, 1913년 3명의 선교사가 파송된 것이다.

첫 타문화권 선교사였던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은 5월 선교사 임명을 받았다. 당시 산동성은 중국 문화의 발상지로 우리나라보다 작은 규모였으며, 인구는 5000만 명으로 추산됐다. 그러나 공자의 출생지로 유교의 오랜 역사를 안고 있는 이 지역은 외래 종교에 매우 배타적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중국 교회는 한국 선교사들의 활동은 산동성 일부인 래양(萊陽, 라이양) 지역으로 국한했다.

# 1년 만에 3명의 세례인 배출

중국말도 서툰 3명의 선교사들의 사역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13년 11월 산동성 래양현 중국인 가옥을 빌려 생활을 시작한 선교사들은 언어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1년 만에 3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40여 명의 신자를 모았다. 1917년까지 중국에는 6곳의 기도소가 운영됐고 세례인도 20명을 훌쩍 넘겼다.

그러나 1916년 박태로 선교사가 질병으로 귀국했고, 1917년 김영훈, 사병순도 사역비 부족과 자녀 교육 등을 이유로 선교지를 이탈했다. 본국의 허락없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총회는 황급히 중국에 다녀온 바 있는 방효원 목사를 파송하고 중국 선교를 이어가도록 지시했다.

방효원, 홍승한에 이어 1918년에는 박상순 선교사가 증파됐고, 김윤식 등 평신도 의사 선교사의 자발적인 참여도 있었다. 김윤식 선교사는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하고 산동으로 들어가 선교에 협력하며 ‘계림의원’을 개원, 자비량 선교로 헌신했다. 파송받은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가난한 현지인들을 무료로 치료하고 교회 서적을 반포하면서 중국인들의 마음을 여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게 뿌리내린 중국 선교는 1930년대까지 성장세를 이어갔으나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까지 불안정한 정국에 휩싸이면서 정체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1937년 파송된 방지일 목사가 산동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도를 맡은 후 중국 교회를 돌보다가 1957년 방지일 선교사가 귀국함으로 44년간 지속되던 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해외선교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고 역사학자들은 서술하고 있다.

# 첫 중국 선교의 의미

장신대 변창욱 교수는 “산동 선교는 한국 교회와 장로교 역사상 첫 타문화권 선교로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해외 교회의 도움 없이 100% 순수하게 한국 교회의 자력으로 이뤄낸 선교로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또 “한국 교회의 중국 선교는 서구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로 추진되지 않았다”며 “한국 교회 첫 의료 사역을 통한 복음전파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100년의 역사가 흐른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선교사 파송에 매진하며 복음전파에 앞장서고 있다. 산동성 선교는 첫 자립 선교의 의미를 넘어 제도적으로도 선교부 중심의 전문 사역의 틀을 마련하고 선교지 언어 공부와 안식년 제도 등을 마련하는 기초가 됐다.

지금도 놀라고 있는 한국 교회의 세계 선교. 당시 미 북장로교 곽안련 선교사는 첫 선교사 파송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1912년 전국 내 7노회를 포함한 조선총회가 창립됐다. 이 경하할만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전국 교회는 대연보를 거출하며 3인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 교회가 선교 받은 지 28년 밖에 안 된 때였다. 실로 세계에 유가 없는 경이적 사실이 아니고 무엇이랴.”

자립 타문화권 선교 100년. 이제 한국 교회는 선교사 파송 정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선교계 일각에서는 “선교사 파송 2위라는 경이적인 시선이 아직도 우리에게 고정되어 있지만, 100년 전 첫 선교사 파송의 열정과 사명, 그리고 선교의 본질이 제대로 이어지고 있는지 돌아볼 시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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