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리의 산실 니케아의 낮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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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의 산실 니케아의 낮과 밤
  • 승인 2002.08.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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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 이스탄불, 그러나 거기에 역사의 흔적은 뚜렷이 있었지만 살아있는 신앙의 숨결은 완전히 멎어 있었다. 술탄 아흐 마드 사원에서 내려다 본 이스탄불 시가는 낮게 깔린 희뿌연 매연의 연기 속에서 묘한 이국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분주한 서양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조용한 동양 같기도 하고 오래된 옛 것인가 하면 최근의 새 것이고 화려한듯 하면서도 수수한, 마치 서양의 품안에 안긴 동양의 여인을 연상케 하였다.

터키 가이드가 서둘러 재촉하지만 않았어도 히포드롬 광장 안에 있는 몇가지 역사 기념비들을 볼 수 있었을텐데 쉴 겨를 없이 제멋대로 돌아가는 시계바늘이 못마땅하게만 여겨졌다.
못내 아쉬운 마음을 뒤로 남긴 채 우리는 황금뿔(Golden Horn)을 오른쪽에 끼고 간간히 부서진 옛 성곽들을 무심코 바라보면서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달리다가 향긋한 바닷 내음이 코를 찌르는 어느 선창가에 차를 멈췄다.
그리고는 버스까지 통채로 담아버린 큰 여객선을 타고 지평선 위에 아득히 떠있는 회색 도시를 향해 마르마라의 푸른 물결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는 유럽을 떠나 저 유명한 종교회의 도시 니케아가 손짓하고 있는 아시아로 건너가고 있는 것이다.

멀리 왼편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슴 벅찬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보스포루스 해와 그 위에 구름처럼 아스라이 걸려 있는 서스펜션 다리(1.5Km)가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불현듯 한 팔로 이쪽 아시아를 껴안고 한 팔로는 저쪽 유럽을 품어 보고 싶어지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감상적 충동일까? 그 다리 넘어에는 역시 종교회의로 유명한 칼케돈과 터키 연가 나오는 위스퀴다라가 있다. ‘위스퀴다라 기데리켄 알디다 비르아무르’ 6.25에 참전했던 터키 병사들이 유행시켰다는 이 노래는 그 애절한 사랑의 사연 때문에 지금도 많이 불리워진다고 안내자 미미는 그 뜻 모르는 가사를 여러 번 불러 주었다.

칼케돈과 니케아 그리고 콘스탄티노풀, 교회사의 앞부분을 몇 장 들추게 되면 자주 눈에 띄는 지명들이다. 주후 313년 2월, 기독교는 밀라노 칙령으로 합법화되기는 했지만 교회적으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이 쌓여져 있었다.
그 중에서 신앙과 신학의 최종 권위인 성경을 확정하고 교리와 생활의 규범을 정함으로써 이단 방지와 교회의 내실화를 꾀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급선무였다.
특히 제 4차 공의회로 모였던 칼케돈에서는 네스토리안 주의와 단성론을 이단으로 판정하고 로마 교황과 총대주교가 동등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이 회의에서는 어느 정도 교리상의 일치는 보았지만 교회적으로는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 아르메니아, 그리스 정교회가 각기 분리되는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일치를 위한 모임이 분열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수수께끼와 같은 신앙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떠들썩한 항구를 벗어나 좁은 노폭의 시골길을 따라 1시간 여 만에 도착한 니케아(지금의 명칭은 이즈닉)는 생각보다 인적이 드문 작은 마을이었다. 종교회의가 열렸었다는 니케아 교회는 몇 차례 보수한 흔적이 있는 낡고 허름한 붉은 벽돌의 건물이었다.
교회 안에 들어서자 천정도 없이 쓰러질 듯이 허물어져 가는 벽틈 사이에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있었다. 교회 안에 안내 표지판과 모자이크 성화 조각들이 없었더라면 이곳이 한 때 교회당으로 쓰였다고는 도무지 믿기우지 않을 만큼 그곳은 완전히 폐허지가 되어져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비두니아의 수도였고 하드리안의 황제에 의해 비잔틴 제국의 역사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니케아, 아니 세계 공의회를 두 차례나 열 정도로 교세가 막강했던 이 종교 도시가 어떻게 해서 저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남겨져 있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보면 니케아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생사를 걸고 치열하게 각축을 벌였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다. 셀주크의 술레이만이 수도로 삼는가 하면 얼마 후 십자군이 점령하였고 밀고 당기는 여러 차례의 전투 끝에 최후 승자의 몫은 오토만의 태조 오스만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이곳을 점령하자마자 기독교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했다. 교회는 모조리 부서졌고 오직 믿는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숱한 순교의 피가 곳곳에 뿌려졌다.

특히 오스만의 아들 오르한은 모슬렘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자신의 전사들과 크리스천 처녀와 과부들을 강제로 결혼시켰고 아야소피아(Ayasofya) 교회도 모스크 사원으로 바꿔 버렸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며 탄식했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 현장을 보았더라면 어떤 애가를 불렀을까?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르도다”(애 1:1,2).

주후 1세기에 축조했다는 이스탄불 문을 지나 귀로의 길에 들어섰지만 한번 무겁게 내려 앉은 착잡한 마음을 추수리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우리 일행은 차안에서 터키의 복음화를 위해 큰소리로 통성기도를 드린 후 복음송을 힘차게 부르기 시작했다. 짙푸른 감람나무 숲 사이로 한가롭게 누워있는 니케아 호수가 그 잔잔한 물결을 출렁이면서 우리가 돌아가는 길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고영민목사(천안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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