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가 되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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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 되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 공종은 기자
  • 승인 2011.11.02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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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대 최연소 졸업, 최연소 미국 변호사 정지현 씨

“하나님께서는 저를 최고가 되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늘 2인자였고, 학교 또한 최고의 학교에 다니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저를 쓰셨고, ‘하나님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25세 청년, 정지현. 그 젊은 나이에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그것도 한 번 만에 땄다는 이 청년. 그것도 모자라 모교인 한동대학교 설립 이후 ‘최연소’라는 수식어를 둘씩이나 달았다. ‘최연소 졸업’, ‘최연소 미국 변호사 자격증 취득’. 정지현 씨에게 붙은 수식어다.

궁금증이 더했다. 하지만 샤프함을 기대했던 기자의 예상은 빗나갔다. 변호사스러워 보이지 않는 해맑고 통통한 청년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조금 부은 듯한 얼굴. “어제 학교(한동대)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새벽에 올라왔다”는 대답이었다. 학교로서도 정 씨의 합격 소식은 큰 경사. 학교와 선후배들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떡을 돌렸고, 이런 저런 못 다 한 이야기를 나누다 새벽에서야 올라왔단다.

# 필리핀으로 훌쩍 떠난 선교사 아버지

최연소 미국 변호사 정지현. 언뜻 보기에 고생 없이 자란 얼굴이다. 하지만 정 씨의 이야기는 빡세게 시작됐다. 초등학교 5학년. 한창 뛰어놀 나이에 한국을 떠야 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은 곳, 필리핀으로 가야만 했다. 당시 경기도 이천에서 목회하던 아버지(정덕훈 목사. 안산 영광교회)는 필리핀으로 선교지를 정하고 그야말로 훌쩍 떠나자고 했다. 교회도 번듯하게 지었는데 그 모든 걸 포기하고 선교지로 떠나자고 했다.

‘바기오.’ 바기오에서의 생활은 유학보다는 선교에 가까웠다. 아버지는 아들을 유학생보다는 선교사에 가깝게 키웠다. ‘성경 한 장을 읽어야 용돈 얼마’를 주는 식이었다. 선교사들의 살림살이가 넉넉잖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강한 자녀’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뚝심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찌 아프지 않았을까. “밥 한 그릇이 150원인데 밥만 사고 반찬은 사지 못해 간장을 뿌려서 먹는데도 원망하지 않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학비는 대 주지만 교통비와 용돈은 벌어서 써야 하는 생활이 유학생활 내내 계속됐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읽었던 성경이 마음속에 뿌리내렸고, 이것이 위기와 시험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하는 이유와 힘이 됐다”고 정 씨는 말한다.

이런 정 씨인데도 마음 한구석에는 아픔이 있었다. “나와 비슷한 성적의 친구들도 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데, 아버지께서는 이런 기회조차 허락해 주시지 않으셨어요. 그때 진학한 대학이 선교지에 있던 ‘세인트루이스유니버시티’에요. 나보다 공부를 못하던 아이들도 더 좋은 대학에 가는데, 저는 이런 대학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참 견디기 힘들었고 항상 아쉬웠어요.”

그나마 위안이 됐던 것은 이 대학이 필리핀에서 탑 10에 들어간다는 정도. 지금은 최연소라는 타이틀이 정 씨를 수식하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특별히 뛰어난 아이는 아니었다. “초중고-대학교까지 모두 필리핀에서 공부했는데, 계속 중간 정도였어요. 탑에 올라간 적은 없는 그런 학생이었어요.”

하지만 정 씨는 밝았다. 누구보다 밝았다. 많은 학생들이 부모들의 눈을 피해 마약이나 유흥에 휩쓸리며 자유를 넘어 방탕한 생활에 이르기도 했지만, 선교사의 아들 정 씨는 이들과는 철저히 달랐다.

# 미국에서 닥친 불행

정 씨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대학교 2학년 때. 하지만 유학은 아니었다. ‘워킹 할리데이.’ 아버지의 제안이었다. 때로는 냉랭하게 아들의 바람을 외면했지만, 미국에서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등을 떠미는 따뜻한 아버지였다.

“5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한 뒤 한 달 동안은 여행을 하는 6개월 코스의 프로그램이었어요. 미국에서 했던 일은 놀이공원 아르바이트였는데 ‘아마존 익스프레스’라는 기구였어요. 나름대로 즐겁게 일하면서 5개월은 보냈는데 마지막 날에 일이 터져버렸죠.”

정 씨는 그날이 마지막 출근이라고 생각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매니저의 말은 달랐다. “어제가 출근 마지막 날”이라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예의 바른 한국인 정 씨는 “알았다. 동료들에게 인사나 하고 가겠다”면서 놀이공원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동료들과의 아쉬움을 달래고 돌아서던 길. 한쪽 다리가 놀이기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신음조차 내지 못할 정도의 고통이 온 몸을 휘감았다.

혹독한 시련은 그렇게 닥쳐왔다. 홀로 떠난 곳. 그곳에서 다리가 부서졌다. 부러진 게 아니라 부서진 게 맞다. 모두 8군데의 뼈가 부서지는 큰 사고였다. 그것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구 한사람 정 씨를 보살펴줄 사람은 없었다. 기도밖에 없었다. 철저히 혼자 견뎌내고 해결해야 했다.

‘설마’ 했다. 하지만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진단은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18살 나이의 청년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앞이 캄캄했어요. ‘걷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의사가 원망스러웠고 무서웠어요. 기도밖에 없었죠. ‘저는 것도 상관없다. 하나님, 제발 걷게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어요.”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정 군은 하나님을 붙들었다. 하나님이 자신을 걷게 하실 것임을 믿었다. 기도밖에 없었다. 당시 아버지 정 선교사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0여 년 이상의 긴 필리핀 선교사역을 끝내고 한국으로 부임하려고 준비를 하던 때였다. 집안으로서도 기도할 일이 많은 때였다. 하필 이런 때 사고가 터진 것이었다. 아들의 기도, 누나의 기도, 엄마와 아빠의 기도는 그만큼 간절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가 이어졌다.

얼마나 기도했을까. 의사가 “기적!”이라며 놀란 일이 일어났다. 정말, 수술도 없이 단지 깁스만 하고 있었을 뿐인데 기적같이, 8군데가 부서졌던 다리가 나아버린 것이다. 의사도 눈을 의심하며 “정말, 기적!”이라고 외쳤다. 다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만 흘렀다. 감사만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기도 많이 하라고 하나님이 하신 일 같아요. 그리고 사고도 당하고 그러면서 많을 것을 배우고 신앙적으로도 많이 컸어요.”

일도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보험 처리에서부터 병원 퇴원 문제까지 모든 문제들이 쉽게 해결됐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부임하면서 정 씨도 학업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미국에 남아있을 것을 고집했지만 교회 형편을 전해들은 아들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교회는 그야말로 정 씨가 없으면 돌아가질 않았다. 드럼을 치고 찬양단을 조직해 찬양을 인도하는 것에서부터 방송장비 조작까지 고스란히 정 씨의 몫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교회에 출석하는 초중고교 학생들을 모아 영어를 가르쳤다. 이뿐인가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영어학교까지 개설해 정신없이 생활했다.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도 모르게 6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 본격적인 변호사의 꿈

그렇게 한국에서의 6개월을 보내고 필리핀에서의 대학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변호사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50명 중에 법학과목을 패스한 사람은 단 3명.

“D학점으로 간신히 턱걸이 패스를 했어요.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가능성을 보았다고 할까요. ‘해보면 하면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공부에 자신감이 붙었다. 법에 대해 거부감이 없어지면서 재미있어졌다. 이후 정 씨는 로스쿨에 대한 자신감과 함께 진로를 미국 로스쿨로 방향을 전환시키게 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없었다. 정 씨의 진로는 우여곡절 끝에 한국행으로 결정 났고, 학교는 포항 한동대학교 국제법률대학원이었다. 미국에서 우연히 접했던 ‘갈대상자’와 전성철 변호사의 ‘꿈이 있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는 두 권의 책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정 씨는 공부에도 열심을 냈지만 신앙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필리핀에서 혹독하게 훈련받는 ‘준 선교사’이기도 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매일 예배를 드렸는데, ‘신앙면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무의미하다’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어요.”

이런 정 씨에게 신앙은, 기도는 무엇보다 먼저였다. 남들이 공부하는 시간에 기도했고, 그것도 모자라 남들이 꺼리는 봉사까지 서슴없이 했다. 어느 학교보다 치열했던 국제법률대학원에서 다른 사람이 공부할 때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 하지만 정 씨는 무모하리만치 어리석어 보이는 일에 서슴없이 몸을 던졌다.

“하나님께서 이것(봉사) 때문에 저를 부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느꼈어요. 내가 공부하는 만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0시간을 공부했으면 1시간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공부한 뒤에 하나님을 위한 시간을 내지 않으면 하나님께 죄 짖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다보니 하나님께서 좋은 결과를 주셨다. 1등은 아니었지만 늘 2~3등의 성적은 유지했다. 국내 유명 대학교를 졸업한 선배, 외국에서 유학 온 학생 등 날고 기는 학생들도 많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다른 정 씨를 높여주셨다. 다른 사람들은 섬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는데 시간을 쏟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섬기는 정 씨를 하나님은 높여주셨다.

정 씨를 기도하는 변호사로 성장시킨 아버지 정덕훈 목사(안산 영광교회).

#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니….

3학년 때 ‘최연소’라는 수식어를 거머쥐고 학교를 졸업한 정 씨는 미국으로 들어가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게 된다. 당시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 졸업생들은 미국의 테네시주와 알라바마주에서 변호사 자격시험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잘 진행돼 오던 변호사 시험이 갑자기 중단됐다. 테네시주가 ‘한동대 학생들은 더 이상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통보를 해왔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알라바마. 그동안 1~2명씩은 시험을 보긴 했지만 별 메리트를 느끼지 못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알라바마주에서도 인원 감축 결정이 뒤따랐다. 그나마 전면 중단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런데도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소송을 걸었다. 변호사는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기도하는 것만 남았다”고 짧게 말했다.

함께 공부했던 한 형이 있었다. 아버지가 큰 교회 장로였고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를 열심히 다녔지만 대학교에서는 하나님과는 조금 멀어진 이른바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던 형이었다. 정 씨는 그 형을 위해 기도했다. 하지만 기도를 한다고 해도 참 막막했다. 기도가 잘 되지 않아 눈을 떴는데, 눈물로 기도하는 그 형의 모습이 정 군의 눈에 들어왔다. 그 때 정 군의 마음에 그 형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저 형이 이번에 시험을 보지 못한다면 평생 교회에 나가지 않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하나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 형부터 구해주세요. 내 앞에 있는 저 형. 저 형을 구원하지 못하면 제가 변호사가 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기도가 나왔단다.

모두는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다. 조금 있다 결과가 나왔다. “50명 중 4명에게만 시험을 볼 수 있게 하겠다”는 결정이었다. 아쉬웠다. 하지만 4명이라도 시험을 볼 수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감사한 것은 시험을 볼 수 있게 된 4명 중에 그 형의 이름이 들어있었어요. 너무 감사했어요. 결과가 나오자마자 형에게 ‘축하한다. 형을 위해 기도했다. 형이 시험을 볼 수 있게 돼 너무 기쁘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형이 이런 말을 했어요. ‘지현아, 다른 사람이 한 기도는 다 형식적인 기도 같은데 네가 나를 위해 해 준 기도는 정말 진짜 기도 같다’는 말이었어요.”

하지만 더 감사한 것은 “이번에 하나님을 알게 됐다”고 고백한 그 형의 말이었다. 시험을 볼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똑똑한 사람이고 평생에 이루지 못한 것이 없는 엘리트인데도 한계에 부딪치고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내가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느끼며 하나님이 절대자시라는 것을 느꼈다는 고백을 했다.

정 씨는 더 열심히 기도했다. 그렇게 5개월여가 흘렀고 7월에 시험을 보게 됐다. 하지만 정 씨가 공부한 책은 구형판. 새로 출간된 신간에는 1년 전의 내용은 빠져있었다. 나름대로는 그 책으로 공부하면서 나올만한 문제들을 찍어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이 문제들은 지난 1년 간 이미 출제가 돼버린 문제. 청천벽력이었다. 상식적으로는 전혀 문제로 출제될 가능성이 없는 상황.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제가 공부했던 그 문제가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그 문제가 나온 거예요. 나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문제에서 2문제가 나으면서 하나님께서 좋을 결과를 주셨죠.”

그렇게 정 씨는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것도 한동대학교 최연소 미국 변호사가 됐다. 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 25살의 나이에 미국 변호사가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힘겨운 문제를 안고 저를 찾아와 해결해 달라고 하겠죠. 그런데 불과 26살의 나이에 다른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데 부담감을 느낍니다.”

그래도 정 씨는 ‘변호사’라는 직함이 아직 낯설다. 그래서 더 기도한다.

“하나님은 저에게 그 어느 것도 한 번에 주신 적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실패를 통해 성공을 이루게 하셨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인 것 같아요. 그래서 더 기대돼요. 하나님께서 저를 얼마나 크게 들어 쓰시려고 계속 이렇게 힘든 테스트를 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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