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사각지대 흑인타운, 그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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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사각지대 흑인타운, 그 문을 열다
  • 이덕형 기자
  • 승인 2011.10.19 1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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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상 수상한 김용애 선교사

선교는 상처와 눈물로 만들어가는 커다란 진주라는 꿈 남겨
남은 사명, 신앙ㆍ정서ㆍ인격 교육을 통한 현지 어린이 교육

“저는 사실 아프리카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6개월간 아프리카 선교를 놓고 기도한 끝에 받은 응답은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교직을 뒤로하고 제가 향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포체프스트룸은 낮에 차를 타고 다니기도 위험한 곳입니다. 배고픔과 질병, 범죄가 극심한 그 곳으로 향한 것은 나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말씀에 순종했을 뿐입니다.”

지난 11일 언더우드 선교상을 수상한 김용애 선교사(서울 원천교회 파송)는 이곳에서 20년째 월세 방에서 생활하며 선교를 하고 있다.

# 남아공, 포체프스트룸의 아픔
김용애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포체프스트룸은 백인타운, 흑인타운, 칼라인타운, 인도인타운으로 나눠져 있다. 유난히 인종 차별이 심했던 남아공의 역사는 사람이 사는 동네도 색깔별로 구분시켰다. 그 중에서도 흑인타운은 전 세계 범죄자가 숨는 곳 1위, 에이즈 감염률 1위, 범죄율 1위, 강간율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생지옥을 방불케 한다. 경찰도 들어가기를 두려워하는 이곳에서는 범죄자 제보가 경찰에 들어가면 제보한 사람 가족이 몰살당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한 번은 제가 가르치던 고3 학생 한 명이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마약을 팔던 학생이었는데 신앙이 자라는 과정에서 양심에 가책을 느껴 그만두려 하자 마약 브로커 측에서 가족을 몰살시키겠다는 협박이 이어졌다고합니다. 결국 괴로워하던 끝에 선택한 결정은 자살이었고 그 때 그의 나이는 18살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김 선교사는 흑인타운을 선교의 사각지대로 남겨두지 않았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기도를 통해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이 겪는 또 하나의 고통은 배고픔과 질병이다. 먹지 못해서인지 영양실조와 결핵은 이곳에서는 흔한 병이다. 허약한 사람들은 말라리아에 걸려 죽기도 한다. 먹지 못하는 고통이 질병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어린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기아와 강간으로 희생당하는 아이들도 많다. 유난히 미혼모가 많은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곳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이 되면 집에 가서 수유를 하고 오는 미혼모 아이들도 쉽게 볼 수 있다.

# 복음과 교육으로 품은 빈민가의 아픔
▲ 김 선교사는 지역주민과 연계한 푸드뱅크를 통해 매주 2천5백 명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있다.
‘5년 안에 순교하리라’는 생각으로 출발한 이유도 여기 있었다. 목숨을 걸고 흑인타운에서 처음 시작됐던 길거리 전도는 한동안 계속됐다. 하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주위의 만류가 이어졌고 방법을 찾던 끝에 김 선교사는 흑인타운 경찰서장의 협조를 얻어 경찰서 내 선교를 시작하게 됐다. 버스터미널 근처에 위치해 비교적 유동 인구가 풍부한 그곳은 누구나 전도 대상이었다. 2백여 명을 모아놓고 시작된 경찰서 선교는 지금까지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다.

그 외 기발한 노력들도 이어졌다. 선교의 폭을 넓히기 위해 김 선교사는 현지 고등학교 교장의 협조를 얻어 어느 교실이건 1교시에 들어가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협조를 얻어낸 것이다. 또한 해당지역 법원에서도 수석 판사의 승낙을 얻어 법원 내 어디에서도 전도가 가능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커다란 수확이었다.

종교적 편향성 문제로 거부됐던 법원 내 포교의 문을 활짝 연 것은 현재 세계 어느 곳에서도 동일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이후 김 선교사는 ‘포체프스트룸 뉴 비기닝 선교센터’(이하 PNBC)를 건립했고 이곳을 통해 교회와 학교에서 매주 2,500명에게 복음과 함께 음식을 나눠주는 푸드뱅크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PNBC 법인명으로 9개의 교회를 설립했는데 그 목적과 이유는 단 한 가지, 기아와 질병으로 형성된 악순환의 고리를 복음과 교육으로 끊기 위함이었다.

# 약속과 헌신
아픔에 대한 공감은 개인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았다.

“온몸이 푸르스름한 색깔로 부풀어 올랐던 아기를 보며 동네 의사는 페니실린도 소용없으니 그냥 좋은 곳에 묻어주라고 말했답니다. 귓가에 맴도는 그 말에도 어머니는 저를 집에 데려오셔서 따뜻한데 두면 병이 더 곪을까 봐 찬 곳에 누이고는 밤새 눈물로 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다음날까지 죽지 않고 이어진 저의 삶. 지금까지 병치레 한번 없이 강건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병약했던 어린 그에게 이 경험은 ‘왜 나를 살려주셨을까’하는 의문으로 남았다. 그리고 의문에 대한 답은 신앙에서 찾았다. ‘나는 빚이 있다, 나를 살려주셨으니 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신앙고백은 이렇게 시작됐고 지금에 와서는 선교의 목적과 이유가 됐다. 목원대학 전신인 감리교대전신학대학의 설립부터 그 이후까지 사무국장으로 선교사들과 함께 했던 아버지에 대해 남아있는 기억도 선교 활동에 도움이 됐다.

구역장, 재정부, 학생회 담당 등 다니던 원천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봉사활동도 이어졌다. 그러던 중 1990년 6월쯤 아프리카에서 헌신할 기회가 생겼다. 더 나은 선교지를 원했던 김 선교사는 6개월간 울면서 기도했지만 또 다시 헌신의 기회를 주실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1991년 2월 28일자로 선생으로 근무하던 학교에 사표를 내고 25년의 교사생활을 마감했다. 47세의 나이, 교장과 교감이 되기 충분하다는 얘기도 있었기에 주위에서는 헌신을 해도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며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러나 김 선교사에게 헌신은 하나님과의 약속이었다. 그 다음에는 말씀하시는 대로 해야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집과 돈이 남아 있으면 돌아오게 됩니다.” 단호하게 결단을 내린 김 선교사는 돌아올 근거를 다 없애기 위해 종이 한 장 안 남기고 다 처분하고 떠났다. 국내에 아무것도 없으면 선교를 포기하고 돌아올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 보이지 않는 도움의 손길
“사람들이 보내준 헌금을 쓸 때는 늘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니까요. 헌금은 하나님의 돈입니다. 그 쓰인 곳을 언제나 세고 계십니다.저는 선교사역을 통해 언제나 이를 느낍니다.”

▲ 현지법원 결정을 통해 맺어진 위탁부모와 어린이들이 선교부지 내 새 가정을 꾸렸다.
선교를 하기에 힘든 곳인 만큼 보람 찬 일들도 이어졌다. 그동안의 활동으로 신뢰를 쌓은 김 선교사는 국가로부터 1.8헥타 (5,400평)가량의 땅을 무상으로 제공받았다. 더 놀라웠던 일은 지금 그 곳에 들어선 센터 건립 금액 대부분이 김 선교사의 부친의 헌납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한 모친과는 달리 현직에서 은퇴한 이후 신앙인이 된 아버지가 거의 전 재산을 헌납한 데는 사연이 뒤 따랐다.

어느 날 새벽기도를 가던 김 선교사의 아버지는 강도를 만나 싸우던 중 크게 상해를 입었다. 의사가 살 가망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큰 상처였다. 그런데 병상을 지키기 위해 일시 귀국한 김 선교사가 원천교회에서 잠시 간증한 내용과 기도를 병상에서 들은 아버지는 점차 회복하셨다. 이후 쾌유하신 아버지는 선교센터를 세우라고 돈을 건 냈고, 선교센터는 그렇게 건립됐다.

힘들고 어려운 곳에서 선교를 하다 보면 주변에서 헌금을 보내주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때는 딸 결혼식에 들어온 축의금을 인터넷을 보고 보내줬다. 사업을 통해 모은 돈을 보내 준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보내온 선교헌금으로 교회가 하나씩 세워져 나갔다.

선교 부지를 처음 받았을 때 시에 제출한 설계도에는 50채의 집을 지을 수 있도록 계획되어 있었고 시에서는 이를 승인했다. 김 선교사는 먼저 안전을 이유로 주위에 520m의 담을 붉은 벽돌로 둘렀다. 이후 교회를 먼저 세우고 6개의 주택을 지었고 현재 2채가 건설 중이다. 집 한 채, 한 채에는 법원 결정을 통해 인정받은 위탁부모와 어린이들이 최소한 한 가정 당 6명이 들어가 살 계획이며 현재 6가족이 입주를 마쳤다. 김 선교사는 이제 남은 42채를 더 짓는 일과 이들이 가족으로 생계를 유지해가게끔 도와주는 것이 자신의 남은 사명이라고 밝혔다.

# 남은 사명을 향한 꿈과 비전
김 선교사가 이를 시작하게 된 데는 꿈과 비전이 있다.

“고아원에 들어온 아이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교육 시키고 양육하는 것이 나의 꿈입니다. 신앙교육, 정서교육, 인격교육을 통해 재능을 개발하고 취미를 살려주는 것이 나의 큰 비전입니다. 저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기도로 이 꿈과 비전을 이루어나갈 것입니다.”

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루어가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 김 선교사는 이 비전과 꿈을 위해 앞으로도 그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뿐이라며 사역에 대한 바람과 생각을 나타냈다. 향후 교회 간 연합 차원에서 진행되는 선교사역이 활성화 됐으면 한다는 바람도 뒤따랐다. 김 선교사는 이와 관련해 한국 교회가 외국에 나가서는 서로 동역하고 협조하는 면이 취약한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한국 교회의 선교 현실을 진단할 때 선교지에 가서 독특한 사역을 독자적으로 하는 것은 평가를 받지만 함께 동역하거나 협조하는 것은 남의 일을 해주는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하는 김 선교사는 “이런 것이 해외선교의 장애물이 되고 있으므로 이제는 한국 교회의 선교에 대한 개념 자체가 바뀌길 바란다”는 소망을 밝혔다. 김 선교사는 오는 26일 다시 남아프리카 포체프스트룸으로 향 한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라고 말하는 김용애 선교사는 선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남겼다.

“신앙은 내게 진리이고 삶입니다. 그래서 선교는 내 사명입니다. 신앙에서 시작된 일, 하나님께서 그만두라고 말씀하시지 않는 이상 이 사역을 계속 할 것입니다. 주어진 사명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것이고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은 절대적입니다. 선교는 그래서 상처와 눈물로 만들어가는 커다란 진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 책가방을 나누는 자리에 많은 어린이들이 모였다. 남아공의 희망은 신앙, 정서, 인격 교육에 있다고 김용애 선교사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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