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에따라 섬기고 나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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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르침에따라 섬기고 나눌 뿐입니다”
  • 이덕형 기자
  • 승인 2011.10.12 14: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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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봉사로 복음 전하는 장제한 목사

넉넉하지 않은 교회형편 속 짜장면 봉사, 단기선교로까지 이어져
'수건과 대야'프로그램으로 개척교회 목사들에게 희망 선사

“통일이 되면 북으로 출발합니다. 당일 저녁 출발하면 다음날 아침이나 점심에는 짜장면 봉사가 가능합니다. 오늘 저녁이라도 당장 출발할 수 있게 준비돼 있습니다.”

철조망이 걷히는 날 장제한 목사(창성교회 담임)는 성경과 음식재료를 가득 실은 트럭을 타고 교인들과 함께 북한 주민 봉사선교를 위해 바로 떠날 계획이다. 어디가 될지 모르지만 도착해서 그는 마을 주민 모두에게 짜장면을 대접할 계획을 갖고 있다.

주님을 믿으란 조건으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섬기고 나눌 뿐이다. 굳이 어디에서 오신 누구냐고 묻는다면 장 목사는 “나누기 위해 왔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왔다”고 전할 뿐이다.

# 마음의 길을 여는 짜장면
서울 우면동에 위치한 창성교회 장제한 목사는 군부대 짜장면 봉사선교 사역으로 유명하다. 넉넉하지 않은 교회 재정 형편에 무료로 봉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맛과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서서 더욱 그렇다고 말한다.

환갑을 조금 넘긴 63세의 나이. 부모의 심정으로 두 그릇, 세 그릇 부족함이 없이 마음껏 먹으라고 말하는 그는 자신의 신앙과 인생 경험에 비춰볼 때 삶은 섬김과 나눔의 과정 그 자체라고 말한다.

“알죠. 장병들도 제가 목사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예수님 믿으라는 말을 할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특별히 말 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장병들과 만나 안면을 익히고, 다음에 서로 친해지고 또 다시 만나 반가워질 때쯤이면 한 명, 두 명씩 왜 봉사를 하는 지 물어옵니다. 목사님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요. 그렇게 친해지면 알면서도 들어줍니다. 하지만 모르는 상황에서는 듣더라도 바로 흘려버립니다.”

장 목사는 선교에 있어 짜장면 봉사선교는 세 가지 강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에게의 접근성, 동원성, 그리고 복음의 길 터주기, 길 닦아주기 측면 등이 그 것이다. 이는 장 목사가 짜장면 봉사선교를 시작한 원인이기도 하다. 짜장면 봉사선교는 그렇게 지체장애우들을 찾아가는데서 시작됐고 양로원과 같은 복지시설을 한동안 찾으면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어나갔다.

군부대 짜장면 봉사선교에서는 20여 년간 중국에서 주방장 경력을 갖고 있는 조선족 윤인호 집사의 실력이 최고로 발휘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6년, 한 달에 적게는 두번 많을 때는 여섯번까지 봉사를 떠났다. 가면 부대 전체에 짜장면을 제공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는 그는 지난 8월에도 제주도에 있는 해병대, 공군, 해군 사역을 위해 교인 42명과 함께 떠났고, 짜장면을 통해 2천여 명의 장정과 만날 수 있었다.

“현 이동 장비로는 최고 3천명, 보통 2천명까지 짜장면 봉사가 가능합니다. 현 장비가 두 배가 되고 냉동차가 지원된다면 논산훈련소 장병 3천명이나 4천명도 가능합니다.”

한산도, 거제도, 제주도 등 도서지방에도 다녀왔고 금산과 같은 농촌 지역에서도 짜장면 봉사를 했다.

평균 수명을 90세로 볼 때 20세에 신앙을 갖게 되면 남은 70년 간 변화된 삶을 살게 된다. 마찬가지로 12살부터 섬김과 나눔으로 봉사의 삶을 경험하는 학생들은 그 경험이 남은 80년 정도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장 목사가 봉사의 길을 떠날 때는 초ㆍ중ㆍ고등학생은 물론 청년부도 함께 어울려 떠난다.

저들도 살리고, 우리도 살리는 삶. 장 목사는 “내가 떠나도 그 애들이 세대를 통해 섬김과 나눔의 정신을 이어갈 것”이라며 “이와 같은 봉사의 삶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 장비를 두고 오면, 마음도 남겨집니다
짜장면 봉사선교는 해외 단기선교로도 이어지고 있다. 장 목사는 내년 2월에 필리핀 민도르섬 원주민을 찾아 짜장면 봉사를 할 계획을 갖고 있다. 산 속 오지, 5시간 이상 걸어야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그 곳에 50명 정도 팀을 꾸려 다녀올 생각으로 지난 5월에는 사전 답사도 이미 다녀왔다. 장 목사의 해외 단기 봉사선교에 있어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은 그 곳에 장비를 두고 온다는 점이다.

“장비를 두고 오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두고 와야 다시 가니까 두고 옵니다. 자주 찾아야 마음이 열리고 반가워지고 또 보고 싶어지는 법입니까요.”

지난 필리핀 마닐라 빈민촌 사역을 갔을 때도 장비를 두고 왔다. 1천5백만 원 가격의 장비를 두고 오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다시 찾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에 현지 선교사들의 선교의 길을 앞서 닦아드리기 위한 망설임 없는 결정이었다.

지난 필리핀 사역에서 이틀 간 1만4천명 분의 짜장면을 공급한 일도 사전에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에게서 자문을 몇 차례 얻은 후에 나온 결과다.

차별 없이 동네 사람 모두를 다 섬기며 봉사하는 까닭에 어딜 가든지 현지 관공서로부터도 환영 받는 점도 봉사선교가 갖는 매력이라고 말했다.

# 쉼과 회복을 위한 ‘수건과 대야’
짜장면 봉사선교 사역 이전 절망에 놓였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개척교회 목회자를 무료로 섬기는 ‘수건과 대야’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목회자가 회복 되는 일은 성도 1만 명을 전도하는 일과 같다는 심정으로 목회자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장 목사는 10년 전 몸과 영혼이 지친 목사님들의 재충전과 회복을 위해 '수건과 대야'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5개월째 월세가 밀린 작은 지하 예배당에서 부흥을 위해 드린 일천번제 기도가 그 출발점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예배당 바닥이 물로 흥건해지는 그 곳에서 드린 3,100일 간 이어진 기도에 대한 응답은 “더 힘든 미자립 교회와 개척교회 목회자를 위로해라”는 마음의 울림이었다.

교인들과의 협의를 통해 목회자를 섬기는 ‘수건과 대야’ 봉사를 시작하기로 결정했고 신문에 '목회에 열 받은 분, 교회를 떠나고 싶은 분'이란 문구로 광고를 내보냈다. 호응이 없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첫 회에만 18명이 모였다.

그리고 2회에 40명, 3회 60명, 10년째 접어든 올 해에는 150명의 목회자가 모였다. “올해는 개척 교회를 하시던 한 분 중 너무 힘들고 지친 가운데 우울증으로 3개월간 자살을 심각히 고민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신문광고에 ‘열 받은 분’이란 문구를 보고 마지막으로 따지기라도 할 심정으로 왔고, 실제로 그 분은 속초에 도착하자마자 떨어져 죽을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었다 합니다. 다행히 지금은 가정 교회 재단을 다시 쌓아 시작했고 9명의 성도가 함께 하고 있다 합니다.”

프로그램은 목사님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간다.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내고 모두 쏟아버리는 쪽에 무게를 두고 진행되는 것이 주요 골자다.
 
참여한 목회자들의 회복을 통해 그동안 여러 성과도 뒤 따랐다. 장흥 벧엘교회는 건물을 건축할 수 있게 되었고, 여수 상봉교회는 처음 18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이삼백 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시골 교회인 이곳을 찾기 위해 오히려 여수, 광양, 순천 등에서 교인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 피했던 목회의 잔
섬기는 목회의 길로 들어선데는 개인적인 신앙의 여정도 바탕이 됐다. 43년 전 장제한 목사가 19살 이었을 때 그는 27일간 병상에서 사경을 헤맸다. 복막염이었다. 그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맹장염으로도 세상을 떠났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탓에 모두가 가난으로 허덕이며 살던 그 시절, 맹장염으로 배가 아파 죽을 것 같아도 돈이 없어 병원 문턱도 밟지 못한채 진통제로 버티는 일은 보통이었다. 그렇게 참다가 맹장이 썩어 터져 복막염으로 번지기가 다반사였고 그러면 열에 일곱은 죽어 나갔다.

“1960년대, 우리가 살던 시절은 형편이 그랬습니다. 1968년에 장기를 1.5m가량 잘라 냈는데도 주위 사람들은 ‘곧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더군요. 붙잡고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간 예배당. 중학교 때 ‘신학교가서 목회자가 되라’는 누군가의 말에 장 목사는 속으로 ‘나는 목사는 안하고 돈 많이 벌어 장로로 봉사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슬픈 길인 줄을 직감했었는지 피하고 피했던 잔이었다.

그의 눈앞에 십자가가 보였다. 첨탑 위의 십자가. “주님, 살려주시면 섬기겠습니다.”

약속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 서울지하철에 들어가 근무했다. 시간이 흘렀고 역장이 되기 위한 시험을 6개월 앞둔 어느 날, 병상에서의 약속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때의 약속을 버리면 지금 이 자리에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길로 장신대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목회할 생각은 없었다.

“신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갑자기 사임하는 바람에 담임을 맡으라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준비가 안됐는데, 그래서 안 된다고 생각 했는데, 주님의 뜻에 반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섬기게 됐습니다.”

그 날로 직장에 사표를 냈다. 서울지하철 동료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시험은 무난히 통과할 것으로 모두 생각했기 때문에 역장의 길을 버리고 42세에 신참 전도사의 길을 택한 그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90년, 두 자녀와 아내가 있던 그가 350만 원의 월급을 받던 자리를 포기하고 37만 원의 사례비를 받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렇게 말한다.

“행복해 지는 길을 가르쳐 드릴까요.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똑똑하면 절대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너무 똑똑합니다. 안타까울 만큼이나요.”

# 신앙은 내게 인생입니다
“내게 신앙이란 인생입니다. 나를 알게 됐고, 하나님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내가 살 영원한 본향은 하나님 나라라는 것. 이것만 잃지 않는다면 어떤 고난과 힘든 일에도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확실한 것 그것이 나의 신앙입니다.”

장 목사는 그러기 위해서는 섬김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익이 없는 곳에도, 소속 교회 이름이 걸리지 않은 곳에도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 어울려 함께 해야 합니다. 꼭 내가 다 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가진 것을 조금 나눌 수 있는 마음만 필요하지요. 내가 다하면 결국 교만해집니다.”

장 목사는 봉사도 섬김도 모두 복음 전파가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전파가 핵심인 이상 내세울 이름도 그리스도 하나뿐이라는 것이다.그래서 그는 해야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은 나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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