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손자 잃어버린 그 순간, 주님은 손을 잡아주셨죠"
상태바
"하나뿐인 손자 잃어버린 그 순간, 주님은 손을 잡아주셨죠"
  • 이덕형 기자
  • 승인 2011.09.28 15: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동포교회 첫 여성 장로 이덕남 씨

'약한 자를 강하게 들어 쓰시는 주님' 붙들고 걸어온 삶의 여정
마지막까지 중국 동포들의 영적인 눈 떠지도록 돕고 싶어 

서울 가리봉동 중국동포교회(담임: 김해성 목사) 이덕남 장로의 남편은 마을 이장이었다.

동네 이웃 주민의 우물을 대신 파주다 옆집 우물이 터지는 바람에 물과 흙, 돌무더기가 범벅된 곳에서 숨 한번 제대로 못 쉬고 세상을 떠났다.

첫째 아들은 날 때부터 중증 뇌성마비 환자.

대를 이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둘째 아들이 낳은 손자는 밥을 먹다 목이 메여 자기 키 보다 큰 물독에 물을 떠먹으려고 몸을 기울이다 독 속에 거꾸로 몸이 박혔다. 하나 밖에 없는 손자도 그렇게 폐에 물이 가득 찬 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손자 앞길을 조금이라도 터주기 위해 상해 위에에서 일을 하며 고된 하루하루를 보내던 이 장로는 손자가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기구하다. 죽을까 몇 번이고 결심했고, 한 번은 수일동안 곡기와 물을 끊었다.

“그래도 안 데려 가십디다. 포기는 차라리 편하죠. 밤 낮 눈에 아른 거리는 손자가 웃는 모습은 사람을 죽지도 살지도 미치지도 못하게 만듭디다.”

이 장로의 아버지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 불교를 믿었던 가문에서 자라났다. 이후 부모님이 중국 하얼빈으로 이주 한 뒤 다시 산두강 근처로 보금자리를 옮겼는데 그 곳이 바로 이 장로와 언니의 고향이 되었다. 1994년도에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산동성 위에로 나온 이 장로는 한국계 회사 사장님의 아파트에서 가정부로 지냈다.

# 고통의 낙락에서 만난 주님
삶의 고비, 고비 현실이 차가우면 차가울수록, 일상이 고되면 고될수록 이덕남 장로는 보통 사람이 일생에 한 번 겪기도 힘든 일을 여자의 몸으로 혼자 견디고 겪어 나왔다. 그러던 90년대 중반 먼저 신앙을 접하게 된 여동생의 권유로 어렵게 기독교인이 되었다.

“당시 복음을 전하러 온 여동생에게 ‘예수 믿으라고 나에게 권하려면 차라리 오지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 드릴 돈이 있으면 차라리 술 사먹고, 고기 사먹겠다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불쌍한 언니를 찾던 여동생도 “이제는 언니를 위해 기도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는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그렇게도 가슴에 남아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며 밤새도록 눈물이 나와 베개를 적셨다는 그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신앙을 갖게 된지 몇 달이 안 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둘째 아들이 낳은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손자 박경태 씨는 어렸을 때 열이 너무 많이 나 시골 병원을 찾았는데 거기서 주사를 잘못 맞은 탓에 신경 장애로 말을 못하게 된 후천적 농아였다. 그래도 일상 사람이 하는 일은 모두 하는 터라 손자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산둥성 위에에 나와 가정부 일을 하던 이 씨에게는 남은 삶의 이유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물을 떠먹으려고 물독으로 몸을 숙이던 손자가 물독에 빠져 세상을 떠났을 무렵, 며느리는 마작을하러 이웃에 가있었고 아들은 볼일 보러 자리를 비웠다고 한다. 산둥 위에에서 가기엔 너무 먼 거리. 배로 9시간 거리인 대련에 가서 다시 24시간 기차를타고 다시 버스를타고 더 들어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 손자가 죽은 그 때 이 장로는 가보지도 못하며 타들어가는 가슴만 쥐어짜 내려갔다.

신앙을 갖게 된 계기 중 하나도 첫째 아들과 하나밖에 없는 손자의 장애를 고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삶의 이유가 사라졌다. 그 후로 일주일 동안 물도, 밥도 안 먹고 버텼는데 죽지도 않았다며 이 장로는 한 숨을 내 쉬었다. 손자가 죽은 뒤 술도 먹고 욕도 많이 했다.

그 때 조선족교회에 다니던 여동생과 윤 씨 성을 가진 성도가 찾아와 이 장로의 손을 붙들고 기도했다. 기도를 하고 난 후 여동생과 같이 온 윤 씨가 안 가겠다는 이덕남 씨를 택시에 태워 예배당에 데리고 갔다.

“예배당 안에 들어가니 서러움에 복받쳐 울었습니다.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울 수가 없었는데 예배당에서는 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울고 울며 마음에 맺힌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 왔습니다.”

당시 그대로 살았더라면 우울증이나 정신병에 걸렸을 거라는 이 장로는 신앙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없을 거라고 말했다. 예수 믿고 마음에 평화는 왔지만 여전히 한 걸음은 세상에 나가 있었다는 그는 손자 생각 때문에 술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찬송가 363장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를 부를 때면 은혜를 받게 된다는 이 장로는 “그동안 이 무거운 짐을 왜 주님께 안 맡기고 나 홀로 지고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며 “이제는 괴로울 때마다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하면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말했다.

예수 믿고도 사라지지 않는 손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 장로는 술과 춤을 끊을 수가 없었다. 사람과 사귀기 위한 춤이 아니라 당시 무엇엔가 몰두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혀 허리를 펴지 못하게 된 일이 발생했는데 다시는 술 안 먹고 춤을 안 추겠다는 기도를 드린 후 낫을 수 있었다.

# 중국동포교회, 첫 여성장로가 되다
한국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먼저 들어온 둘째 아들의 비자 만료기간이 한 달 밖에 안 남았기 때문이었다. 이 장로가 와서 국적을 취득하게 되면 둘째 아들도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고 해서 입국했고 그렇게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 장로는 세례를 받을 때 3일을 금식하고 입교 세례식을 받았다. 삼일 간 물도 음식도 입에 대지 않은 이유는 주님께 서원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장로에게는 비록 삼일 간의 금식이지만 현실적으로 고된 일과 때문에 하루도 물과 음식을 안 먹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3일간 금식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며 금식을 시작했다. 주위에서 쓰러진다고 만류했지만 하나님께 드린 서원이라고 목사님께 말씀드리니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그대로 진행했다.

이 장로는 장로로 피택되었을 때 여러 차례 사양했다. 배운 것도 없고 부족하고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목사님을 뒷받침 할 수 없을 같았다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이라는 점과 나이가 많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담임 목사님과 주위의 권유가 있어 ‘약한 자을 강하게 들어 쓰신다’는 말씀을 의지하고 삼일 간 금식하고 장로 직분을 받게 되었다.

“세상에서 벌레만도 못한 불쌍한 인생을 하나님이 택해서 이렇게 장로로 임명하시니 감사드리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1년이면 어떻고 2년이면 어떻습니까. 직분을 맡은 동안 목사님의 동역자가 되어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겠습니다.”

#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
중국동포교회는 사실 직분자로 임명을 해도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작년에 25명의 권사를 세웠는데 그 중 6명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현재 19명이 남았다.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 교회, 목회자 중심으로 하나님의 크신 뜻과 의를 구하겠습니다. 비록 배운 것은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일에는 언제든지 최선을 다하고 부르시는 곳은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한국을 찾아오는 중국 동포들은 신앙도 없고 대부분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렵다. 이 장로는 이들에 대해 중국 동포 교회가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먼저 이들에게 쉼터와 급식을 제공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이 장로가 섬기는 중국동포교회는 이를 위해 중국 동포가 많은 대림동과 영등포에 교회당을 세우게 해달라고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통성으로 한 시간 삼십분씩 기도하고 있다.

같은 한민족 한 동포로서 한국 사회에 적응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일도 하고 있다. 중국 동포 교회의 비전은 중국 동포들이 한국에서의 신앙생활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어 저들을 통하여 중국 선교를 활발하게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 마지막까지 전하고 싶은 말
이 장로는 중국 동포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많다.

전도를 하다보면 체제의 차이나 이념의 차이에서 올 수도 있는 문제지만 일단 한국에 온 중국 동포들은 거의 모두가 천국과 지옥을 잘 알지 못한다고 한다. 중국 동포들 중에는 오히려 신앙인이 더 나쁜 일을 많이 한다고 지적하며 신앙을 갖기 전에 착한 일을 많이 하라는 말을 이 장로는 가끔씩 듣는다.

그 때마다 그는 “저 사람들은 당신들 보다 선하게 살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천국에 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하게 산 당신들의 삶에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기 때문에 많은 선행에도 불구하고 지옥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예수 님을 믿으라고 권한다.

예전에는 선한 일 많이 하면 천국 가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에 갈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이 겪었던 과정을 거울 삼아 중국 동포들의 영적인 눈이 떠지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한국 교회에 대해서는 “문화적 차이는 있을지라도 같은 민족임에도 중국동포와 한국인을 분리해서 보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며 “예수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형제자매라는 말씀대로 같은 신앙을 가지고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인정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