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간 딸아이의 꿈, 브라질 아이들의 미래로 영글다
상태바
먼저 간 딸아이의 꿈, 브라질 아이들의 미래로 영글다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1.09.22 14: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브라질 저소득층 자녀 무상교육으로 섬기는 엘림학교 김재진 선교사

엘림학교 설립 14년 째, 지역주민들의 신뢰 가장 큰 소득
정기적 후원 없어 헌옷모아 바자회에 팔며 운영비용 마련
‘신앙과 인성’ 조화 이루는 교육 통해 한-브라질 가교역할

그녀가 한국을 다시 찾은 것은 14년 만이었다. 먼저 하나님 품으로 떠나간 딸의 꿈을 이루겠다며 브라질에 무료 탁아소를 세운 김재진 선교사가 잠시 한국에 나왔다. 55세 늦은 나이에 시작한 선교. 이제 그녀의 나이 일흔을 앞두고 있다. 흘러간 세월만큼 탁아소도 성장했다. 이제는 0세부터 만 14세까지 아이들을 돌보는 어엿한 ‘학교’가 되어 있었다.

“14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어요. 학교 폐쇄 위기도 겪었고, 더 크게 키울 수 있었는데 아쉬움이 많아요. 그래도 지난 8월에 14주년 감사예배를 드리고 더 큰 꿈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브라질 상파울로 따뚜아뻬 마을. 이곳은 중산층 밀집지역이다.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곳에 무슨 무료 학교가 필요할까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이 마을에는 먼 지역에서 돈을 벌겠다며 올라온 빈곤층 여성들이 홀로 자녀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김재진 선교사가 세운 ‘엘림학교’(www. escolaelim.com.br)는 ‘까리엔치 복지재단’으로 승인을 받았다. ‘까리엔치’는 ‘부족한 아이들’이라는 뜻으로 정부가 허락한 비영리 교육기관이다. 한국으로 치면 대안학교 형태로 무료 탁아소와 유치원, 그리고 방과후 교실 등이 운영된다. 40-50명 정도의 학생들은 편부모 가정이나 빈곤층 자녀들이 대부분이다. 7세 이상의 아이들은 정규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방과후 교육을 받는다.

교육 프로그램은 영어와 스페인어, 발레, 태권도, 컴퓨터, 피아노, 클래식 등 다양하다. 빈곤층 자녀들에게 사치스럽게 여겨지는 교육 프로그램들. 그러나 김 선교사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고집하고 있다.

“가난한 아이들이라고 해서 재능교육에서 소외받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가난이 되물림 되고, 낮은 교육수준을 물려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중산층 자녀들이 받는 교육혜택을 이 아이들에게도 주고 싶었어요. 또 엄마들이 엘림학교에 아이들을 맡겨 놓고 마음껏 일을 하다보면 소득 수준도 높아지죠. 그들이 가난을 벗고 더 부유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무척 행복했습니다.”

33년 전 브라질로 이민을 떠난 김재진 선교사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친구처럼, 아이처럼 늘 엄마 곁을 지켜주었던 윤재 양. 상파울로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윤재 양에게 통증이 찾아온 것은 지난 1996년 경. 눈과 머리의 통증을 호소하던 딸은 브라질의 병원에서 ‘빠라고니아스’라는 희귀병을 진단 받았다. 일종의 기생충이 머리에 귤만한 혹을 만들었다는 설명이었다. 김 선교사는 딸을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브라질보다 높은 의료수준의 한국이라면 딸의 병을 고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진단은 더 참담했다. ‘뇌암’이라고 했다. 혹에 물을 빼고,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그런데 진전이 없었다. 물을 빼려고 벌려 놓은 머리에서는 고름이 흘렀고, 항암치료의 후유증으로 반신마비가 찾아왔다. 모녀는 치료를 포기하고 다시 브라질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랑하는 엄마와 친구들의 찬송 소리를 들으며 딸은 발병 7개월 만에 하나님의 품으로 떠났다.
“딸의 꿈이 브라질 아이들의 미래를 열어주는 것이었어요. 인종을 넘어서 불쌍한 아이들을 돌보고 싶다고 늘 말하곤 했어요. 그림을 가르치고 싶어 했고, 천국을 전하고 싶어 했죠.”

딸을 잃은 후 김재진 선교사는 곧바로 무료탁아소를 시작했다. 미국 엘림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아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벌였다.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학교를 세웠고, 작은 선물가게를 운영하며 학교 경비를 마련했다. 하나님과 딸을 반반씩 사랑했던 김 선교사는 남은 생을 오직 주를 위해 살기로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비영리재단을 운영하면서 ‘선물가게’라는 수익사업을 하는 것에 대해 누군가 투서를 넣었어요. 그 이후 세무감사와 압류, 경매 등 어려운 과정의 연속이었죠.”

작고 연약한 한국 이민자에게 브라질은 그렇게 쉽게 복지사업을 허락하지 않았다. 물품이 압류되고 마을을 떠나라는 명령도 있었다. 그때부터 브라질 정부와 치열한 싸움이 시작됐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서류를 갖추었고, 정부의 허락을 받아 시작한 복지재단이었어요. 투서에 의한 조사부터 잘못된 것이었죠. 룰라 대통령 비서실로 전화를 하고 지역 관할 부서에 항의 서한을 보냈어요. 수년에 걸친 싸움이었어요. 이렇게 소진하지만 않았어도 학교를 더 키울 수 있었는데,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브라질 정부는 김재진 선교사의 엘림학교를 인정했다. 처음부터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재단이었다.

김 선교사는 그동안 정부의 잘못된 조사와 행정으로 인한 손실을 보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역시 수년째 재판서류가 계류 중인 상태에 놓여 있다. 사실 브라질 정부와 싸운다는 것 자체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 것. 주변 한인들조차 김 선교사가 쉽게 포기할 것이라고 염려했지만 지난 14년 간 그녀는 단 한 번도 엘림학교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학교를 지역주민들의 신뢰와 보육을 맡긴 부모들의 적극적인 지지속에 운영되고 있다.

“가장 큰 성과라고 하면 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진 것이지요. 맞벌이 혹은 외벌이 상황에서 자녀를 살뜰히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예요. 이주가 잦은 부모들은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없어요. 학교에 보내는 것도 맡기는 것 이외에 큰 의미를 찾지 못했던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들이 달라졌다. 학교를 찾아와 자원봉사를 하기도 하고, 야단을 쳐도 믿음으로 맡긴다. 엄마들이 후원조직을 만들어 약간의 간식비를 제공하는 등 상당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아이들도 “졸업하면 봉사하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지금 졸업생들이 봉사자로 참여하는 ‘순종과 헌신’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신앙과 인성’이라는 교육 목적도 아이들에게서 살아나고 있다. 학교에 오면 예배를 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믿지 않는 교사들도 엘림학교에서는 믿음의 공동체에 순종한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김 선교사가 직접 장을 보아 신선한 재료로 음식을 만들고, 기도와 찬양으로 영육의 건강을 책임진다. 아이들에게 이제 기도는 습관이 되었고, 말씀을 따라 사는 변화도 일어났다.

변변한 후원 이사회도 없고, 정기적인 후원도 파송교회의 지원도 없다. 그런데도 김 선교사를 14년 동안 엘림학교를 꾸려왔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헌 옷이요. 헌 옷으로 학교를 운영했어요.” 이번 한국 방문 중에도 지인들에게 “헌 옷을 모아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김 선교사는 브라질 교민들과 중산층 지역 인사들, 그리고 각종 단체에서 보내온 헌 옷을 바자회에 내놓고 그 수익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비영리재단이기에 바자회 수익에 대한 세금은 없으며, 정해진 곳에서 옷을 팔아 간간히 운영비를 마련했다.

한 번은 브라질 수해로 교민들이 의류를 수집해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더니, 정부가 먹을 것이 아니면 안 받겠다고 거부해 수집품이 고스란히 엘림학교에 전달됐다. 어려운 중에도 때마다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김 선교사는 늘 체험하고 있었다.

“제 나이 70이에요. 그동안 선교 동역자를 찾았는데 실패했어요. 다른 곳보다 할 일이 많아서인지 선뜻 헌신하지 않더라구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가르치는 일에 뜻을 모아 브라질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동역자를 만나고 싶어요. 한국과 브라질 교류를 위해서도 엘림학교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학교는 전체가 ‘하나님의 선교’예요.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한 아이들이, 또 부모와 교사들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얻는 곳이랍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내는 변화를 보면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브라질에서 반평생을 바친 김재진 선교사.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엘림학교의 성장을 보는 것이다. 정부의 탄압으로 7년 전 이주한 따뚜아뻬 마을 학교 건물은 현재 임대로 사용 중이지만 이곳에서 더 많은 꿈을 영글게 하고 싶다고 했다. 또 남미에 부는 한류바람에 맞춰 ‘한글학교’도 열고 체계적인 교육을 실현해 “교민이 운영하는 학교가 제일 좋다더라”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져 열매를 맺듯이, 우리 딸이 남긴 꿈이 밀알이 되어 브라질에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과 인성을 키우는 교육, 가난한 아이들의 미래를 밝게 열어주고 그들의 재능을 찾아주는 교육, 이것이 딸의 꿈이었어요. 늙은 어미에게 남은 일은 더 많은 열매가 맺히게 하는 것뿐이죠. 지난 14년 키워온 나무에 탐스러운 복음의 열매가 열리길 바랍니다.”

10월 초 그녀는 다시 브라질로 돌아간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고국행. 연로한 자매들과 친구들을 만난 짧은 시간에도 그녀의 마음은 늘 브라질을 향해 있다. 이젠 그곳이 ‘고향’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주신 남은 시간, 브라질의 가난한 자녀들은 김재진 선교사의 품 안에서 기도로 자라게 될 것이다. 먼저 간 딸을 안아주듯 그녀의 따뜻한 손길은 언제나 따뚜아뻬 마을 아이들을 어루만지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