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그린 찬송가 ‘아름다움’을 추억하다
상태바
손으로 그린 찬송가 ‘아름다움’을 추억하다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1.07.22 10: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마지막 찬송가 정사가 양재식 원로장로
1970년대에도 한국 교회 찬송가 악보는 컴퓨터처럼 정교했다. 당시 악보가 치밀한 수작업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찬송가 악보 정사가가 없었다면 한국 교회가 1970~80년대 부흥기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 한국 전쟁 이후 민족 전체가 안고 있던 슬픔과 한(恨)을 어르고 달랬던 찬송. 그 이면에는 묵묵히 찬송을 아끼며 악보를 그렸던 찬송가 악보 정사가들의 노력이 있었다.

초동교회 양재식 원로장로(82)는 현재 생존해 있는 유일한 찬송가 악보 정사가다. 1970~80년대 찬송가 악보 정사가로 활동했던 이는 모두 세 사람. 두 명의 전문가는 이미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두 세 차례 인터뷰를 요청한 끝에 지난 8일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어렵게 그를 만났다. 젊은 시절 반평생을 악보 그리기에 매진했던 양 장로는 여전히 찬송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숨김없이 보여줬다.

# 찬송가 악보 정사의 과정 
작은 나무 상자에는 손바닥 크기의 놋(구리)으로 된 음표가 그려진 판이 잔뜩 들어 있었다. 아래를 들추니 음표는 물론 각종 악보 기호가 각인된 새끼손가락 모양의 놋기둥인 ‘자모’(글자의 어머니라는 뜻)가 정렬돼 있었다. 모두 악보를 정사하는데 쓰이는 정밀한 도구들이었다.

잠시 어색한 눈인사를 나눈 후 양 장로는 악보 정사에 관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한국 교회 찬송가 악보 정사의 역사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음표 하나까지 손으로 그렸던 당시의 간절함, 심혈을 기울였던 열정이 떠오르는 듯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먼저 찬송가 악보를 정사하는 방법이 궁금해 물었다. 양 장로는 하얀 갱지를 들어 보였다. 거기에는 손바닥 크기의 음표머리가 그려져 있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찬송가 악보에는 2mm도 채 안 되는 작은 음표머리가 수두룩하다. 손바닥 크기의 음표머리를 그린 이유가 뭘까. 양 장로는 또렷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설명했다. 

“하얀 갱지에 그린 커다란 음표머리를 놋으로 옮겨 새깁니다. 놋에 그려진 큰 음표에 납을 붓고 기계를 통해 새끼손가락 크기의 막대로 만듭니다. 그러면 막대 도장 자모가 됩니다. 이 자모에 잉크를 바르고 악보에 하나하나 찍어 그립니다.”

양 장로는 하나의 찬송 악보를 완성하는 데 평균 3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여섯 명이 한 조를 이뤄 작업을 한다. 한 명은 자를 대고 오선을 그린다. 자에는 간격을 정확히 맞추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 그 위에 높은음자리표를 붙인다. 또 다른 한 명은 음표머리만 찍는다. 다른 한 명은 음표기둥을 세우고, 또 다른 사람은 음표꼬리를 붙인다. 

이처럼 여섯 명이 한 몸처럼 작업을 해야 찬송가 악보 하나가 그려지는 것이다.

악보마다 소요되는 시간은 각기 다르다. 찬송가 550여 장에 이르는 악보를 그리기 위해서는 산술적으로도 약 1,700시간이 소요된다. 밤낮없이 꼬박 70일 이상 그려야 한다는 의미다. 양 장로는 “실제로 찬송가 한 권 전체를 정사하기 위해서는 반년 정도를 꼬박 전념해야 했다”고 말했다. 

컴퓨터가 없던 그 시절에 정교한 악보로 찬송가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노고 덕분이었다. 인쇄기를 통해 짧은 시간에 대량으로 찬송가를 찍어내는 지금에 비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일 수밖에 없다.

# 악보 정사가가 되기까지
1970년대 당시 찬송가를 정사하는 기술은 한국전쟁 이전에 비하면 발전된 것이었다. 복사기도 없고 인쇄술도 발달하기 전 한국 교회는 찬송가를 수기로 베껴서 나눠보거나 일본에서 건너온 찬송가 위에 한글로 글씨를 써서 봤다. 

양재식 장로는 “전쟁 이전에는 일본에서 들어온 찬송가 악보를 손으로 베끼고 그 위에 한글로 글씨를 썼다”며 “전쟁이 끝나고부터 악보를 그리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때부터 한 두 권씩 악보 책이 나왔다”고 회고했다. 

양 장로는 모태신앙이었다. 어려서부터 교회 음악을 접했다. 찬송가를 좋아했던 그는 “어머니가 기독교인이셨고, 어릴 때 나를 업고 먼 길을 걸어 교회에 다니셨다. 가는 길에 어머니의 찬양소리를 듣고 자랐다”고 말했다. 

음악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던 그는 사범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이 와중에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6.25는 당시 한국에 살았던 모든 아무개처럼 양재식 장로의 삶도 송두리째 앗아갔다. 강릉지역 사단장의 권유로 군악대에 들어갔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무 살. 군악대였지만 강원도에서 부산, 부산에서 다시 강원도를 거쳐 중국과 접경지역인 낙동강 근처까지 강행군을 했다. 한반도를 두 차례나 종단한 셈.

치열했던 전쟁 통에 그는 사단에서 주최하는 콩쿠르에 참여해 당선된 인연으로 군악학교에 입학했다. 성악 실력이 출중했던 것이다. 전쟁 후 서울에 올라온 그는 지인의 권유로 초동교회를 다녔다. 남다른 음악실력 덕분에 양 장로는 출판사에서 초등학교 교과서 악보를 정사하는 일을 했다. 국내에서 손가락에 드는 악보 정사 전문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러던 1970년 어느 날 출판사 사장이었던 김영진 장로(초동교회)가 찬송가 정사를 권했다. 양 장로는 “그렇지 않아도 찬송가를 내 손으로 그리는 것이 꿈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여섯 명의 직원들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찬송가 정사에 매진했다.  

“그때 내가 찬송가 악보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참 복입니다. 손이 많이 가고 일이 힘들었지만 얼렁뚱땅 넘기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착실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찬송가 음표를 그려 나갔습니다.”

한때 양재식 장로의 악보 정사 실력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았다. 미국은 물론 영국과 독일 등 유럽에서도 악보 정사 의뢰가 들어왔다. 그의 악보 정사 과정을 보기 위해 미국에서 사람들이 찾을 정도였다. 감탄하고 돌아가 의뢰가 더 많아졌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미국의 한 회사는 1980년부터 1985년까지 5년 연속 그의 악보 정사의 전문성을 인정해 상을 보내왔다. 

# 아름다움과 아쉬움
그는 지금 컴퓨터로 쉽게 만든 찬송가 악보는 “아름답지 않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정성이 덜 담겼고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통해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찬송가와 고도의 정밀한 정사 작업을 통해 손으로 완성된 찬송가는 분명 달랐다. 주의를 기울여 악보를 보니 정사가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러나 시대는 빠르게 변했다. 양재식 장로의 찬송가를 바라보는 시각도 고정돼 있지 않다. 찬송가 음악만 고집하지 않는다. 그는 교회에서 빠른 비트에 드럼을 치며 부르는 흔히 말하는 복음성가나 가스펠도 찬송가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양 장로 “예수를 믿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세대에 맞는 노래가 따로 있다”며 “노래를 잘하기 위해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잘 믿기 위해 찬송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996년 3월 성서교재간행사에서 발행한 ‘큰 글자 해설 찬송가’를 끝으로 그는 더 이상 정사 의뢰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마지막 정사 작업도 동료 없이 혼자서 해야 했다. 2000년을 즈음해 악보 정사 작업은 자취를 감췄다. 1970년부터 2000년까지 약 30년간 존재했던 악보 정사가는 이제 세상에 없는 직업이 됐다. 

그는 “이제는 컴퓨터를 따라갈 수 없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발달된 과학 문명의 편리함은 어떤 이에게는 자기의 역사를 도둑맞은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찬송가를 만들던 시대는 가고 없다. 하지만 변하지 말아야 할 것도 분명히 있다. 한국 교회는 1976년 이후 찬송가 통일 위원회를 통해 하나의 찬송가를 사용해오고 있다. 찬송가의 거룩성과 함께 간직해야 할 유산이다.

그는 최근 한국 교회가 찬송가공회 법인 설립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는 상황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일부 교단이 단독으로 찬송가를 만들려는 움직임에 대해 반대한다며 “하나의 찬송가를 쓰는 전통이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룩한 찬송가를 보급하는 일에 ‘장사꾼 논리’ 따위가 개입해선 안 된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인터뷰 도중 그는 놋(구리)으로 만든 높은음자리표를 손으로 들어 보였다. 이어 그는 “예전에는 악보를 다 손으로 그렸다. 찬송가가 나온 것을 생각하면 1940년대 이후에 정교하게 그리는 사람이 생겨났다”며 찬송가 정사가의 역사를 소개했다.

그는 멋들어지게 놋 막대를 들어 하얀 종이에 찍어보였다. 오선을 긋고 그 위에 음표를 찍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정교하고 예민한 작업처럼 보였다. 텅 빈 종이에 찍힌 음표에는 이제는 사라진 악보 정사가라는 직업에 대한 아쉬움도 함께 묻어 있었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탑 놓아간다.”

양재식 장로는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가 무색할 만큼 구성진 목소리로 멋스럽게 찬송가를 불렀다. 세월의 깊이가 담긴 찬송은 진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