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정말 사랑했습니다. 당신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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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정말 사랑했습니다. 당신이 그립습니다”
  • 표성중 기자
  • 승인 2010.10.13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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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복협, 월례발표회 통해 ‘신앙 선배들’의 삶 조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초대 교회 사도들의 복음증거가 없었다면 복음의 세계화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땅에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 교회는 없으며,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복음을 증거했던 신앙 선배들이 없었다면 ‘한국 교회 부흥’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영적 지도자들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그들 중 몇몇은 영원한 하늘나라 처소에 들어갔다. 최근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김명혁 목사)는 ‘신앙의 선배들을 기리며’를 주제로 이들의 삶을 조명하는 월례발표회를 개최했다. 그들이 간직한 신학과 신앙, 목회 열정을 고스란히 이어 받은 후임 목회자들의 고백을 통해 복음을 향한 신앙 선배들의 열정적인 삶을 들여다 본다. <편집자 주>

▲ 이철신 목사(영락교회)
● 예수님을 많이 닮은 한경직 목사


한경직 목사님은 균형잡힌 목회를 하셨습니다. 사실 영락교회보다 더 민족을 복음화하는데 관심을 갖고, 노력을 기울인 교회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한 목사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27년 동안 시무했습니다. 원로목사가 되셔서 소천하실 때까지 28년 동안은 민족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한 목사님의 민족복음화 안에는 복음과 애국심이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은 고통을 경험했고, 공산주의에 의해 나라가 무너지는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그만큼 나라에 대한 생각이 강했습니다. 저의 애국심과 한 목사님의 애국심의 온도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특히 한 목사님의 인격은 신행일치로 축약됩니다. 그의 인격은 겸손에서부터 시작해서 온유로, 더 나아가 화평으로 나아갔습니다. 후임목사로 곁에 있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한 목사님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목회자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과정 중에 있는 저는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제가 흉내도 내기 어려운 겸손을 봤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도 한 목사님을 성자라고 부른 것은 그의 겸손때문이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늘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1992년 유명한 템플턴 상을 받았을때도 인사말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신사참배한 죄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그로부터 목회하는 방법을 배우진 못했지만 한 목사님의 인격이나 삶의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의 겸손과 온유한 인격, 섬김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았습니다. 그를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 대화’·화합’의 장을 만든 강원용 목사


여해 강원용 목사님은 ‘빈들’의 삶을 사셨습니다. 한국 역사의 급격한 정치적, 사회적, 민족적 전환기에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결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강 목사님의 신학은 ‘성육신 신학’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자체가 강 목사님의 성육신적 ‘세상 참여 목회’를 가능케 하고 뒷받침해 온 신학적 기저였습니다.
특히 강 목사님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선구자적 헌신을 해오셨습니다. 교단과 교회협의회를 넘어 아시아와 세계를 넘나드는 글로벌 에큐메니즘의 선두주자가 되어 활동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또 다른 대화적 삶의 틀을 만들어 내고 헌신했습니다. ‘종교간의 대화’를 한국땅에서 창시한 목회자였습니다. 한국의 6대 종단의 대화로부터 시작해 한국, 아시아, 세계 차원의 ‘종교인 평화회의’의 주도적 위치와 역할을 해왔습니다.
강 목사님의 종교간 대화는 구원론에 관한 대화담론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종교인들’의 참된 ‘종교인 모습’, 곧 종교인들의 세상구원을 위한 ‘인간화’를 말하려고 했습니다. 즉, ‘종교의 대화’가 아닌 ‘종교인들의 대화’였습니다. 그는 ‘사이’와 ‘넘어’가 공존하는 신앙,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합일되는 십자가 신앙, 보수와 진보가 결합해 제3의 길을 찾고자 하는 중간 매개 집단의 형성, 환경문제를 중심으로 한 세대간의 대화와 연대의 틀 닦기 등을 통한 ‘하나됨’의 모색에 집중했습니다. 말년에는 혼신을 다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준비의 길 닦기에 나섰던 점도 오래오래 우리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이라는 그의 성서적 좌우명이며 신학적, 신앙적 고백과 함께 ‘사이’와 ‘넘어’의 조화를 추구하는 삶을 배우고 싶습니다.

▲ 이정익 목사(신촌성결교회)
● 지성과 영성의 조화를 이룬 정진경 목사


정진경 목사님은 ‘온화한 성품’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그분만이 지닌 성품이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고 다가갈 수 있는 타고난 인품을 지니셨습니다. 그의 웃음이나 대화나 인상에는 따뜻함과 온화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온화함은 그분만의 상징이었습니다.
깊은 신학과 영성이 잘 어울린 목회자이기도 하셨습니다. 지성과 영성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조화를 이룬 아주 성숙한 영적 지도자였고, 신학자, 목회자였습니다. 그의 지성과 영성의 조화는 모든 목회자들의 이상적인 모델입니다.
‘평화의 사도’셨습니다. 그분의 모습, 언어, 대화, 관계에서 탁월한 평화를 느낍니다. 좌우가 잘 정돈된 성숙한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가는 곳에는 화합과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목회하는 목회 현장에서도, 각종 모임에서도, 그가 속한 단체에서도 좌우를 넘나들며 탁월한 조화력을 발휘하면서 섬기셨습니다.
‘머문 자리’가 아름다운 분이었습니다. 목회를 마친 후에도 여전히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떠난 자리가 매우 아름답고 깨끗한 이 시대 은퇴자의 모델이었습니다.
‘마음그릇’이 큰 어른이셨습니다. 정 목사님은 한 교회, 한 교단, 한 교리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교단과 교계의 정치노선이나 자신의 입지, 자파의 이익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파를 초월하고, 신학과 이념의 좌우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아우르는 삶을 사셨습니다.
정 목사님의 마음에는 그늘이 없었고, 편파나 모난 부분이 없었습니다. 하나됨과 전체에게 유익이 된다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 시대 진정한 사도였습니다. 아주 좋은 지도자요, 목회자요, 신앙 선배를 알게 된 것을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 박성민 목사(CCC 대표)
● 복음의 불씨를 끊임없이 나눈 김준곤 목사


김준곤 목사님의 삶은 고된 순례자의 삶이었기에 영원한 안식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빈자리가 우리들에게 허전함과 그리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김 목사님은 우리들의 멘토였습니다. 고민거리를 들고 의논을 드릴 때면 답을 주시면서도 그래도 기도해 보라며 하나님의 뜻을 묻도록 말씀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사자후를 토하듯 복음의 메시지로 도전하셨으며, 눈에 가득 고인 눈물로 듣는 이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의 통일이 되는 그 순간까지 매일 아침을 금식하기로 작정하시고, 평생을 지키며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향한 헌신을 더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신앙적 삶의 모델이셨습니다.
그의 소박하고 검소한 삶은 물질주의에 젖어 살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가 하는가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친구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의 삶을 살기 원하며 학원 복음화, 민족 복음화 및 세계복음화에 헌신하고,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구호를 가슴에 새기며 예수님의 친구답게 사셨습니다.
헌신과 연합을 향한 작은 불꽃이 되셨습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복음 전파와 선교를 위한 불쏘시개였으며, 하나의 불씨였습니다. 목사님을 사랑하는 모두는 불씨가 됐습니다.

▲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
● ‘제자훈련’의 선구자 옥한흠 목사

옥한흠 목사님의 목회 결정체는 제자훈련입니다. 그분의 사역의 시작이요,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 제자훈련의 신학적, 성경적 틀이 잡히지 않았던 극히 초보적인 단계에서 목사님은 교회론을 재정립하셔서 제자훈련의 성경적 틀을 갖추도록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통해 선지자적 위엄과 존엄성을 드러내셨습니다. 설교는 그에게 있어 생명줄이었습니다. 설교를 방해하는 모든 것이 불허의 대상이었습니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설교의 기초를 세우고 묵상하는 시간에는 외부 전화를 받는 것은 물론이요 외부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삼가셨습니다.
일주일 내내 그렇게 준비하고서도 때로는 주일 새벽까지 씨름을 하면서 설교 원고를 수정하셨고, 또 수정하셨습니다. 그렇게 준비된 말씀을 마치 그림자 복싱처럼 여러 번 혼자서 설교하시면서 교우들의 귀에 제대로 들려지도록 고쳐나가셨습니다.
사람을 키우고 세우는 목사님의 목회 철학의 진면목은 세대 계승을 통해서도 보여주셨습니다.
옥 목사님은 은퇴 후에 후임 목사가 교회에 뿌리를 내리는 일을 위해 마음을 다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세대 계승의 밑바닥에는 한 사람을 키우고 세우는 일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는 목사님의 헌신의 초석이 있었습니다. 옥 목사님은 진정한 복음주의자이셨습니다. 일평생 복음의 매력에 빠져서 그 복음을 심고 뿌리를 내리며 복음의 열매를 맺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쏟았던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복음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복음의 제단 위에 자신의 전부를 드리셨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복음으로 한 생애 전부를 드리셨던 옥 목사님의 외침에 진정으로 귀를 귀울여야 합니다. 
                                                                                           <정리 = 표성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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