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채널을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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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채널을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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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10.06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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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업 목사<예음교회>

소통이 필요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소통은 중요한 과제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에 소통을 더 많이 말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특정 정치인들의 행보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온 세상이 자기 사랑에 빠져 자기 자랑에 도취되어 살다보니 이것은 아니라는 자기 반성의 목소리가 아닌가 여겨진다. 아니 군중 속에 고독을 느끼는 자들이 함께 나눌 대상을 찾아 절규하는 소리로 들려온다.

때로는 자기 욕심을 더 채우지 못해, 배고픔의 문제가 아닌 배 아픔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어서 속에서부터 부르짖는 영혼의 소리로도 들려온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에 대답할 것인가? 소통의 부재가 나타나는 원인은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신뢰의 붕괴일 것이다. 서로를 믿기 어려우면 마음 놓고 소통하기 어렵다. 말하는 것이 덜거덕거리고 듣는 말도 덜거덕거린다. 술술 말할 수 있고 술술 들을 수 있다면 소통은 회자 되지 않을 것이다. 신뢰가 안되면 평범한 한 마디도 그냥 마음으로 들어오지 않게 되는 법이다. 난무하는 거짓말은 이제 상식이 되었고 일상이 되었다.

두 번째는 세상의 욕망이다. 세상은 거대한 욕망의 전차와 같다. 멈출 수 없는 전차와 같다. 한 번 시작된 욕망의 관성은 이제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굴리면 굴릴수록 커지는 눈덩이처럼 세상은 그 덩치를 기하급수적으로 키워왔고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소통을 말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소통이 결코 될 수 없다.

세 번째는 개인의 변화이다. 자신도 모르게 자기 속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자신이 그것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무섭게 변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웹서핑을 하면서, TV를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리고 여기서 웃고 저기서 울고 하면서 사람들이 변하고 있다. 관계도 물론 변하고 있다.

네 번째는 가치의 변동이다. 전에는 맞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이제는 맞지 않다고 말한다. 전에는 틀렸다고 당연시 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박수를 받는 세상이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우방도 없다. 영원한 원수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 가치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 가치의 부재는 심리적 불안을 양산하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지워버리고 말았다.

다섯 번째는 언어의 혼란이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데 본뜻이 무엇인지 반복해서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세상이다. 문맥도 필요 없고, 철학도 필요 없다. 언어도 진정한 의미에서 소통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 인맥이 언어보다 잘 통하고, 돈이 언어보다 분명하고, 권력이 가장 확실한 언어가 되는 세상이다. 언어는 본래적 기능을 상실한 채, 촌스런 노리개로 전락하고 있다.

여섯 번째는 불안한 미래이다. 국제 정세는 힘의 논리가 지배한지 오래되었다. 자원전쟁 끝없이 우리를 압박해 온다. 환경문제는 이제 우리의 밥상을 위협하고 있고, 인권문제는 성경이 말하는 죄에 대하여 말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예수님께서 오실 날을 소망하지만 그 때까지 어떻게 견뎌낼지 연약한 영육을 붙들고 벌벌 떨어야 하는 세상이다.

어떻게 이런 세상에서 소통을 말할 수 있을까?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소통을 들먹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소통하길 원한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채널이 열려야 한다. 영혼과 영혼이 통할 수 있는 채널이 열려야 한다.

소통은 신뢰의 회복이나 정치적인 양보나 공정한 대화의 문제보다 높은 차원의 문제이다. 소통은 채널의 문제다.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소통하고자 한다면 서로 사랑해야 한다. 수단과 방법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사랑만이 소통의 문을 열 수 있다. 이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자들이 누구일까.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을 존중한다. 그들을 따른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나 오늘 우리 시대나 동일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통의 비밀을 이미 오래전에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만일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한다면, 세상은 교회를 통해 그토록 갈망하던 소통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세상은 교회로부터 흘러 나가는 공의와 평화를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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