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밀려난 자리, 질펀한 상술과 산타가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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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밀려난 자리, 질펀한 상술과 산타가 점령
  • 공종은
  • 승인 2009.12.2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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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성탄문화, 이대로 좋은가?

“성탄문화가 사라져간다.” 과연 맞는 말일까? 방송과 언론에서는 “성탄과 연말 경기가 안좋다”는 보도만을 연일 쏟아낸다. 어딜 봐도 뭘 봐도 경기가 어둡다는 보도뿐이니 시청자들의 얼굴도 어둡기만 하다. 신나야 할 성탄이고 연말인데 경기가 안좋으니 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상인들 또한 “성탄과 연말 경기가 실종됐다”는 푸념을 쏟아낸다.

성탄과 경기(景氣), 과연 밀접한 관계여야 할까. 그리고 성탄 분위기는 언제나 흥청거리고 향락으로 물들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철저하게 아니다. 왜 예수가 산타에게 밀리고 교회가 백화점에게 밀려야 하나. 말씀이 선물에 밀리고 나눔이 향락으로 물들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성탄의 상업화’가 가장 큰 이유이지만, 성탄의 고유한 문화를 지키지 못한 채 상술과 향락에 내어주고 물들도록 방치한 교회의 책임과 비판 또한 면하기 어렵다.

탄식이 곳곳에서 높다. 불교에 ‘연등제’가 있다면,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고유한 성탄문화는 뭐가 있을까. “많은 듯 한데 막상 손꼽아보면 없는 것 같다”는 말이 귀에 따갑게 꽂힌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겨울문화들이 실은 교회에서 지켜오던 성탄문화라는 사실을 쉽게 발견한다. 성탄트리와 성탄카드가 그렇고 자선냄비가 그렇고, 기억에 남아있는 모든 겨울 문화들이 사실은 교회에서 출발한 우리의 고유한 문화였다.

상업화에 뒤범벅된 성탄문화, 하지만 아련한 기억의 한편에 남아있는 따뜻한 성탄문화. 이제 하나둘 캐내어 그 따스한 온정을 되살려보자.

축복의 노래를 당신에게 ‘새벽송’

새벽바람에 꽁꽁 언 손 호호 불며 밤새 동네를 돌았던 ‘새벽송’. 어린 기억 속에도 새벽송은 아직도 생생하다. 혹여 잠들면 참석하지 못할까, 엄마에게 아빠에게 몇 번을 다짐받으며 “꼭 깨워 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이것도 못미더워 새끼손가락을 걸기를 수십 번, 멀리서 교회 새벽종 소리가 들리면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나 한달음에 교회로 내달렸다. 그 높은 언덕도 한달음이었고, 추운 12월의 새벽도 이날만은 따뜻했다.

교회에 모여있는 형들과 누나들, 그리고 동네 아주머니와 아저씨,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날 새벽만큼은 동네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었다. 이 틈에 섞여 온 동네를 돌며 목소리를 높였다. 으레 주일학교 학생들이 맨 앞장을 섰다. 노래도 제일 앞줄에서 불렀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아라…….”

내 목소리를 하늘에서 들으라는 듯 새벽 닭 울음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새벽송 소리에 깬 닭들이 여기저기 푸득거리고, 동네 개들도 목소리를 보탰다.

새벽송을 돌며 받아온 선물들, 정성이 가득 담겨있었다. 평소에 한번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하는 귀한 과자를 선뜻 내놓기도 했고, 추수한 고구마며 막 쪄낸 따끈한 찐빵을 내놓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 어깨에 짊어진 선물보따리는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의 훈훈한 인심만큼이나 불룩했다.

이 선물들은 성탄절 아침, 홀로 지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이들에게 다시 전달됐다. 교회들은 되로 받아 말로 갚았다. 사회적 나눔이었고 1년 12달 내내 지속되는 섬김이었다.

이제 이 아름답던 기억, 아련하기만 한 추억이 됐다. 도시에서 맞는 성탄절, 아파트 문화, 보이기 싫은 내 집 살림……. 언제부턴가 새벽송이 교회에서 사라져버렸다. 성탄절 아침, 교회로 향하는 자동차 뒷좌석에 실린 멋지게 포장한 선물들은 예배당 입구에 마련된 선물함에 수북하게 쌓인다. 하지만 근사한 포장지들이 새벽송을 돌던 기억과 성탄의 기쁨과 나눔의 즐거움도 함께 포장해 버렸다.

성탄의 빛 온 누리에 ‘성탄트리’

동네 뒷산에서 잘라온 소나무를 강대상 옆에 세우면,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 솜을 떼 눈을 내리게 했다. 아껴두었던 금빛 색종이로는 별을 만들었다. 동방박사를 아기 예수께로 인도했던 그 별에 마음을 담았다. 선물을 받고 싶은 마음에 양말도 걸어놓았다. 온갖 장식들이 완성되면, 이제 성탄트리 장식의 하이라이트. 1년 동안 고이고이 숨겨두었던 반짝이 전구를 조심스레 꺼내 소나무 맨 꼭대기에서부터 빙빙 둘러가며 아랫부분까지 늘어트렸다.

조심스런 손놀림으로 불을 켜면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와~~~!!!!” 누구라 할 것 없이 한순간 한목소리로 쏟아내는 소리였다. 빛이 신기했고 1년에 한번 만드는 성탄 트리가 신기했다. 오래오래 거기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해 주기를 바랐다.

성탄트리가 완성되고 점등되면 그것은 이제 교회와 성도들만의 기쁨이 아니었다. 한겨울 내내 이 불빛은 온 동네를 밝혔고 이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쁨이었고 구경거리였다. 꽁꽁 언 마음을 녹였고, 외롭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로하는 빛으로 다가왔다. 이게 바로 진정한 성탄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 아름답던 트리, 성탄을 축하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담았던 성탄트리, 이제 남의 것이 되어버렸다. 좋게 생각하면 성탄문화가 일반인에게까지 확산돼 ‘모두가 축하하는 성탄’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독교만의 고유한 문화 하나를 상업화에 내어준 꼴이 됐다.

이젠 교회보다 백화점이나 쇼핑몰에서 선수를 친다. 화려하다 못해 거대한 크리스마스 장식은 이제 업체 간 경쟁으로까지 치닫기까지 한다. ‘더 크게, 더 화려하게’가 성탄을 맞는 업계의 모토가 됐다. 상업화에 물든 성탄트리에 더 이상 예수 탄생의 기쁨과 따스함을 전하는 메시지는 발견할 수 없다. 여기에 과연 예수 탄생의 의미가 담길지 의문이다.

“촛불 하나만으로도 성탄의 기쁨을 나눌 수 있었던 그때가 그립구려, 기자 양반.” 아련한 눈빛으로 말하던 70 노(老) 장로의 소회가 가슴에 남는다.

예수 탄생의 기쁨을 나누자 ‘성탄 카드’

매년 이맘때면 성탄카드를 준비하는 마음들이 분주했다. 서툰 솜씨로 밤새워 카드를 만들어 누구에게 성탄카드를 보낼지 명단을 뽑고, ‘누구에게는 이 카드, 누구에게는 저 카드’ 하면서 고르고 골라서 설레는 마음으로 우체국을 찾았다.

이제 펜시 가게에 가면 돈만 주면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다.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사랑의 고백도 담고, 펼치면 입체로 만든 산타와 루돌프 사슴이 튀어나온다. 과거, 성탄을 1달여 정도 앞둔 시점이면 동네 문방구에는 마분지와 색지를 사러오는 교회 아이들로 분주했다. 마분지를 사서 알맞은 크기로 자르고 아껴두었던 색연필로 아기 예수와 엄마 마리아를 그리고 복슬복슬, 토실하게 살찐 양도 몇 마리 그려 넣은 다음 색지를 붙였다. 서툰 영어로 ‘Marry Christmas’라고 큼직하게 썼다. 중학교에 다니는 형이나 누나가 있는 아이들은 뽀대 나게 영어로, 그도 아니면 한글로 썼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무러면 어떤가. 성탄절만큼은 서로가 예수 탄생의 기쁨을 나누는 날이었다. 내 정성이 들어간 카드, 내가 직접 만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카드. 내가 제일 좋아하고 존경하는 목사님과 부모님, 선생님과 친구들의 이름을 달고 손에서 손으로, 혹은 우체부 아저씨의 손을 빌어 전국으로 배달됐다.

카드를 기다리던 그 기다림도 아련하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누르며 누가 나에게 성탄카드를 보낼까를 꼽아보며 예수 탄생의 기쁨이 나에게도 전해지기를 고대하고 고대했다.

이제 값싼 휴대폰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이 이 설렘과 기쁨을 밀어냈다. 손가락 몇 번 움직이고, 마우스 몇 번 클릭하면 이 수고로움(?)을 기계가 대신해 준다. ‘사이버 하트(Cyber Heart)’.

이 기쁨 아기 예수께 ‘크리스마스 캐럴’

카세트 라디오 하나 변변히 없던 시절, 교회 선생님의 풍금에 맞춰 부르던 성탄 캐럴은 그 시절 유일한 기쁨이었다. 예수 탄생의 기쁨을 마땅히 표현할 수 없었던 아이들은 선생님이 가르쳐준 크리스마스 캐럴을 하루 종일 부르고 다녔다. ‘탄일종이 땡땡땡’, ‘저들 밖에 한밤중에’,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셀 수 없이 많은 캐럴들을 눈감고도 부를 수 있게 줄줄 외우고 다녔다.

캐럴에 지칠 때쯤 되면 중고등학교 형과 누나들이 부르고 다니는 영어로 된 가사에 탐을 냈다.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또래들과는 다른 한 차원 높은(?) 어설픈 캐럴을 부르기도 했다.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아는 곡이라도 흘러나오면 옹기종기 모여들어 그 곡이 끝나도록 레코드 가게 앞을 떠나지 않았다. ‘풍금 반주로만 듣던 캐럴이 처음 들어보는 온갖 악기의 반주에 실려 나오는 이런 훌륭한 곡이었다니’ 하고 나름 감탄하면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노래도 재미가 없으면 듣지 않는 시대가 됐다. 캐럴에서 예수는 밀려났고 대신 산타가 등장했다. 루돌프가 날뛰었다. 썰매를 끌면서 갈까 말까 망설이고, 희화된 조폭이 등장하고 전국의 사투리가 어지럽게 섞였다. 뭐라고 말하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랩들이 등장하고 개그맨들의 유쾌한 개그가 우울한 성탄을 깨운다.

정말 재미있다. 너무 재미있어서 웃다가 눈물이 난다. 하지만 친구들과 하루 종일 따라 부르며 마음 한구석을 밝히던 추억은 없다. 그 시절, 캐럴을 부르면 마음이 따뜻하고 훈훈했는데, 이젠 부르면 부를수록 허전하기만 하다.

2009년 12월 성탄절. 예수 탄생의 의미는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하지만 2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달라졌고, 예수를 바라보는 신앙이 달라졌고, 상업화에 점령당한 교회가 달라졌다.

온 동네를 밝히던 따뜻한 성탄 트리, 조심스런 마음으로 사랑을 담았던 성탄 카드, 유일한 기쁨이요 즐거움이었던 성탄 캐럴, 되로 받아 말로 주는 새벽송과 성탄 선물……. 이 모든 것들이 회복돼야 한다. 의미는 퇴색되고 형식만 남은 성탄의 문화, 그 회복의 열쇠는 교회가 쥐고 있다. 예수의 성전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쥐고 있다.

이제 하늘의 노래를 부르고 하늘의 문화를 말하고 전파해야 한다. 내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잠그면 하늘에서도 잠기고 내가 땅에서 무엇이든 열면 하늘에서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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