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01강) 종교적 위선에 대한 경고
상태바
누가복음(101강) 종교적 위선에 대한 경고
  • 승인 2008.05.07 11: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유대 관헌들과의 논쟁 중 여섯 번째 이야기는 종교인들의 위선에 관한 것이다(눅 20:45-21:4). 여기서 종교인이란 서기관들과 부자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특히 이 부분의 기사는 마가복음과 같은 순서를 취하고 있지만(막 12:37-44), 마태복음에는 눅 20:47과 과부의 헌금 기사는 생략되어 나타난다.

마태복음의 생략에 대하여는 다양한 해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유력한 설명은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을 상대적으로 호의적으로 묘사하는 마태복음의 전반적인 특징의 반영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그 증거 중 하나로 지복설교 중 “심령이” 가난한 자(마 5:3)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마 5:6)란 표현을 들 수 있는데, 알다시피 누가복음에는 따옴표 부분이 생략됨으로써 다분히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의미를 고려할 수 있으나, 그것이 추가된 마태복음은 오히려 부요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부유한 자들을 비판하고 반대로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배려하는 누가신학의 사회적 특징이 여기서도 잘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우선 누가가 이 두 이야기를 “과부”라는 연결고리(catch word)를 통하여 한데 묶어 그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음이 주목할 만하다(눅 20:47, 21:2)

부유한 서기관들에게 경제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과부들이 오히려 부요한 종교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주님의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은 신앙의 겉과 속, 참과 거짓을 여실하게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을 만큼 자기희생적인 과부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를 기뻐하는 자기 의(義)로 가득한 부자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대조는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에서 배고픈 가난한 자들에게는 복(福)을, 배부른 부자들에게 화(禍)를 선언한 것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눅 6:20-21, 24-25)

특히 여기서 누가는 오늘날의 신학자에 해당하는 서기관들의 위선적 경건을 정죄하고(45-47절) 부유한 신자들의 안이한 종교성을 비판하고 있다(1-4절).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마태복음에서는 서기관들의 종교적 위선이 주로 고발되었지만(마 23:6-7), 누가복음에서는 그들이 가난한 과부의 가산(원문에는 ‘집’)을 빼앗는 악인으로 소개되면서(눅 20:47) “돈을 좋아하는 자”로 소개된 바리새인들(눅 16:14)과 같은 맥락에서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종교 지도자인 서기관과 부자들을 유사한 부류로 소개함으로써 동격(同格)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돈을 좋아하는 까닭에 가난한 과부들의 재산마저도 강탈하는 부유한 종교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인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누가는 다시금 그 공동체의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을 경고함과 아울러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를 권면하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나타난 평신도와 종교 지도자, 부자와 가난한 자의 대조는 단순히 주님 당대의 유대사회와 종교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서, 이제 오늘 우리 시대의 한국교회에 대한 경고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는 부유한 자들과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부자들의 종교로써 사회에 비쳐짐으로 인하여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구제와 사회사업에 적극적인 천주교에 비해, 개신교의 경우 더욱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주님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들의 위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우리는 먼저 된 자로써 지도자들의 신행(信行) 일치의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백석대 신약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