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아는 만유인력은 지극히 사소한 사건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뉴턴이 고향에 내려가 있던 중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왜 사과는 아래로만 떨어질까? 라는 궁금증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 위대한 발견이 탄생하게 되었다. 엉뚱한 질문이 창조의 출발이 되었고, 과학 발전에 획기적인 이바지를 하게 된 것이다.
3명의 석공이 있었다. 한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십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보면 모릅니까? 저는 돌을 쪼개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자, “이게 제 직업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지막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십니까? 라고 묻자, “네, 저는 지금 아름다운 성전을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왜라는 동일한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일에 대한 석공들의 태도와 열정을 한 눈에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과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 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과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이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들이 만드는 작품의 수준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해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잘 교육받지 못했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낯설고 익숙하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왜 라는 질문을 통해 버려도 괜찮은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지식으로 채워야 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되어진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고정관념화 되어 있는 신앙의 습관들로 인해 오히려 주님께 나아가는 데 불편함을 초래 하는 것들이 있다면 성경말씀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경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태복음 6:5)
<한서대학교 대우교수·유아다례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