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남의 설교를 너무 많이 참고하는 전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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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남의 설교를 너무 많이 참고하는 전도자들
  • 승인 2009.07.2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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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오늘 이 땅에 존재했더라면 아마도 남의 설교를 너무 많이 참고하는 것도 지적하여 개혁했으리라 생각된다. 오늘 남의 설교를 참고하는 정도는 전도자마다 약간 다른 모양이다. 어떤 전도자는 남의 설교를 사이버 공간에서 빼내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강단에서 대독한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 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빼내서 그대로 대독하거나 아니면 그 정도는 아니라도 너무 많이 참고하는 전도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떤 전도자는 교우들에게 발각되어 교회를 떠나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각자가 힘써 설교를 작성하여 은혜를 끼치는 전도자들이 많이 있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말씀의 양식을 때를 따라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 남의 설교를 빼내서 그냥 대독하는 것은 아무래도 진실한 청지기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전도자는 결정적인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문맥을 살피기 위하여 거치는 성경 정독의 단계를 건너뛰게 된다. 설교자는 설교를 작성하기 위하여 한 단락(paragraph)을 50-60번 정독해야 하는데 남의 설교를 가져다가 많이 참고하다가 보면 50번 내지 60번 정독해야 하는 순서를 고스란히 뛰어넘게 되어 그 단락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지나가게 되어 설교자 자신이 은혜에서 멀어지게 된다. 얼마나 애석한 일인지 모른다.

둘째, 본문의 문법을 연구하는 단계를 그냥 건너뛰게 된다. 시제(tense)와 격(格), 그리고 주어 동사 보어 등 많은 것을 연구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을 그냥 넘어가서 단락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설교자가 한 단락을 문법적으로 연구하여 깊이 아는 것은 설교 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그런데 남의 설교를 많이 참고하다 보면 이런 단계를 뛰어 넘게 되니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셋째, 묵상하는 단계를 건너뛰게 된다. 문맥을 파악한 후 중요한 절이나 낱말의 뜻을 깊이 묵상하는 단계를 건너뛰게 되니 얼마나 손해인지 알 수 없다. 묵상하는 동안 받는 은혜의 맛은 바로 꿀(시19:10) 맛인데 남의 설교를 많이 참고하다 보면 남이 해놓은 것으로부터 약간의 은혜만 체험할 뿐 본인에게 필요한 큰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게 된다.

넷째, 한 단락의 뜻을 정확하게 알기 위하여 때로는 형언할 길 없는 진통을 겪는 중에 하나님은 설교자의 성품을 고치시기를 원하시는데 남의 설교를 너무 많이 참고하다가 보면 약간의 은혜만 체험할 뿐 자신의 인격이 고쳐지는 은혜는 별로 체험하지 못한다. 가령 대설교가 스펄죤 목사의 설교를 참고한다 하더라도 받는 은혜는 약간 뿐이고 큰 은혜를 체험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환도 뼈가 위골되는 지경의 고생을 해서 내 자신이 크게 변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예화를 찾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본 교회에 맞는 예화를 찾아야 하는데 그것을 소홀하게 되니 문제이다. 다른 설교자가 바로 자기 교회의 형편에 맞는 예화를 택했을 뿐 그 예화가 내 교회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섯째, 남의 설교 원고를 가지고 설교를 하려고 하는 경우 기도를 많이 할 수 없게 된다. 이유는 말씀 연구를 하지 않게 되어 성령의 역사가 약하니(엡 5:18; 골 3:16) 기도를 깊이 할 수 없게 된다. 기도가 놀랍게 약해지면 결국은 설교에 은혜가 없기 마련이다.  한 번 설교에 최소한 2 시간 이상 기도를 해야 하는데 내 자신이 작성하지 않은 설교를 위해서 기도하려 할 때 긴 시간 기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인터넷 혁명은 우리에게 놀라운 유익을 가져왔지만 싸이버 공간에 떠있는 설교를 너무 많이 참고하다 보면 내 자신에게 있어야 할 은혜가 너무 약하게 되고 내 강단에 은혜가 너무 약하게 임하게 된다.

스윈돌은 “강대상이 흐리게 되면 청중석에는 안개가 끼게 된다”고 말했고 하브너는 “목사의 직무는 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강대상을 채우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은퇴한 목회자들의 피 맺힌 공통의 함성일 것이다. 우리는 한 주 한 주 내 자신이 마지막 설교를 작성하는 심정으로 설교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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