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는 '웨이터와 같은 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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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웨이터와 같은 섬김'
  • 승인 2002.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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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에서의 목회
목회는 헬라어로 ‘디아코니아’(diakonia)라고 한다. 이 디아코니아와 어원이 같은 ‘디아코노스’(diakonos)는 후에 집사를 가리키지만 고대 어법에서는 ‘웨이터’를 의미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문화의 기원을 공동 식사의 업무에서 찾기도 한다. 집사들은 웨이터들이었으며, ‘감독’은 반장 웨이터였을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교회의 사역자를 종종 ‘종’(doulos)이라고 했다.
초대 교회에서 목사가 반장 웨이터였다는 사실은 목회는 지배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21세기에서도 여전히 교회는 웨이터 목사를 필요로 한다. 또한 요한 3서에서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베레에 대한 비판은 노회장, 총회장, 감독 등등의 자리에 연연하고, 그것을 위해 부정을 저지르기도 하는 한국 교회 일부 목사들에 대한 경고가 될 것이다. 이런 자리는 추대돼야 하지 운동을 하고 상대방을 비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중세 교회에 있어서의 목회
초대 교회에서 목회자는 상인, 관리, 군인이 돼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중세 성직자들은 우선 여러 가지 사업을 맡게 됐다. 특히 로마 감독은 대사업가가 됐다.
성직자들이 이렇게 사업과 정치에 개입하게 되자 타락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교구에서 일하는 하위 성직자들은 고위 성직자들처럼 사치스럽게 살 여유가 전혀 없었으며 극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다른 한편 그들은 예배 때 사용하는 라틴어를 뜻도 모르고 주문처럼 외우는 등 무지해 민중들의 경멸을 받았다.
중세 교회에서 성직자들이 사업과 정치에 관여함으로써 타락한 일은 숙고해 보아야 한다. 또한 성적으로 문란함으로써 지탄을 받은 일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성직자는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철저한 연구, 특히 인간 영혼에 대한 연구를 강조한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은 지금은 더 타당한 가르침이다. 후스의 성직 매매에 대한 비판은 항상 우리가 유념해야 할 가르침이다.

종교 개혁시대의 목회
종교 개혁에 있어서의 큰 특징은 설교에 중요성을 둔 것이었다. 교회사에 있어서 설교가 무시되지는 않았지만 설교를 교회생활의 중심에 둔 것은 종교 개혁자들의 공헌이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목사의 직임은 공적·사적으로 가르치고 훈계하고, 권면하고,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성례를 집례하는 것과 장로들 및 동역자들과 함께 형제로서의 교정을 하는 것이다.
목사의 직임 가운데 첫째 가는 것은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의 삶은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삶이며 그래서 가난한 삶이 돼야 한다. 또한 목회자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목사는 무엇보다 학자가 돼야 한다는 가르침을 깊이 유념해 볼만한 것이다. 목사는 다른 사람들의 성경 주석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근대 교회에 있어서의 목회
종교 개혁자들이 일으킨 복음주의운동은 영국의 청교도운동과 복음주의운동, 독일의 경건주의운동, 미국의 대각성운동 등과 목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목회자들의 정신 속에는 개인의 삶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는 사회와 사회적 요인들에 대한 연구, 개인적인 죄뿐만 아니라 사회적 악에 대한 인식, 개인의 구속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원의 방편에 대한 어떤 지식이 있게 됐다.
목회자는 교회의 울타리를 훨씬 넘어서 있는 전진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됐다. 그는 교회만이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에 대한 봉사에 참여하게 됐다.

근대 교회에서 경건주의운동이 일어나면서 성경읽기를 강조한 것은 우리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읽기를 얼마나 강조하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 목사들 자신들이 얼마나 성경을 읽고 있는가? 그러며서도 우리는 죽은 과거의 사도가 돼서는 안된다는 비처의 가라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새로운 과학과 사상에 무지한 것은 결코 자랑일 수 없다.

최근의 교회에 있어서의 목회
20세기에서 강조되던 교회의 이미지는 ‘종’이라고 하는 이미지다. 1966년 강림절에 보스턴의 쿠싱(Cushing) 추기경은 목회서신 ‘종으로서의 교회’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즉 고난받는 종이어야 하며 따라서 종된 교회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회는 화해시키는 일과 상처받은 자를 싸매는 일과 고난당하는 봉사와 치유 등과 같은 사역에 의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린다. 그리고 주께서 ‘타자를 위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교회도 역시 ‘타자를 위한 공동체’여야 한다”고 말한다.
아돌프스(Robert Adolfs)는 ‘하나님의 무덤’이라는 책에서 “교회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똑같이 권력, 명예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모든 요구를 포기해야만 한다. 교회는 권력으로 지배해서는 안되고 사랑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21세기에 와서 성경에 나오는 종의 이미지를 재발견한 것은 큰 업적이었다. 목회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것이다. 나아가 앞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세상 사람들까지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 중에 제일 가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스바냐 3:17에는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보시고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을 보시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서도 인정받고 존경받는 목회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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