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역으로 사랑과 나눔 실천하는 하나님 자녀 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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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사역으로 사랑과 나눔 실천하는 하나님 자녀 될래요”
  • 정재용
  • 승인 2009.07.2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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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사회 섬기는 호산나치과 구호산나 원장

▲ 그는 가정예배주보와 부모님이 보내주신 200여장의 기도편지를 내보이며 ‘신앙의 유산’이 자신의 가장 큰 보물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마중물을 붓잖아요. 저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계획하신 것들을 이루기 위해 마중물을 붓고 있는 중이에요.”

서른 살이라는 조금은 빠른 나이에 치과병원 원장이 됐지만 여전히 마중물을 붓는 중이라고 전하는 유쾌한 웃음의 주인공 구호산나 원장(호산나치과). 하나님의 은혜로 치과병원장이라는 자리에 올랐기에 구호산나 원장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다.

교육자이신 아버지와 목회자이신 어머니 밑에서 말씀으로 성장했지만 자신의 삶의 과정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값진 연단의 시기들도 있었음을 고백했다. 연단을 거친 그의 삶은 ‘성결대학교 후원의 집 1호’, ‘필리핀 의료선교’, ‘기아대책 후원병원’, ‘목회자 치료비지원’ 등 사랑과 나눔 그리고 섬김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 부모님으로 시작된 3대 신앙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전통적인 유교집안의 어른들이셨어요. 어머니만 교회에 다니셨죠. 그런데 교사이셨던 아버지께서 어머니 고향(전남 고흥)의 학교로 발령 받아 여머니를 만나게 됐죠.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좋아하게 되시고,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교회에 나가시게 되시면서 믿음의 가정으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어요.”

전통적인 유교집안에서 성장했지만 가장 먼저 하나님을 만난 어머니. 믿음이 없었지만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교회로 발걸음하다 하나님을 만난 아버지. 조금은 어렵고 평범하지 않게 하나님을 만난 부모님의 신앙은 치과의사 선배이자 든든한 조력자인 오빠와 구호산나 원장에게 귀한 믿음의 뿌리가 됐다.

뿌리의 가장 기초는 가정예배였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가정예배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듯 주보까지 만들어가면서 정성껏 드리도록 가르치셨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실천하도록 하신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그때 드렸던 예배의 주보들을 간직하고 있는데 인도는 누가 했고, 기도는 누가 했고, 말씀은 누가 전했는지 모두 기록돼 있어요.” 가지런히 정리된 주보집을 펼쳐 보이며 자랑하는 구호산나 원장. 20여년이 지나 주보를 꺼내본 구원장은 부모로부터 보여지고 전해지는 믿음의 유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또 그런 작은 정성들이 모여 말씀의 은혜를 나누는 집안으로 변화됐다.

“유교집안의 전통적인 제사를 예배로 바꾸기 위한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10년 전 목사안수를 받으신 어머니는 2001년 경기도 의왕시에 시온성교회를 개척해 목회자의 길을 걷고 계세요. 늦은 나이에 신학을 시작하신 어머니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친척들까지 모두 예수님을 영접하는 계기가 된거죠.”

온 집안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쁨을 맛본 가운데 부모님의 또 다른 기도도 응답을 받았다.

“부모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3대 계승을 위해 오랜 시간 기도해오셨어요. 그런데 오빠가 믿음을 가진 부인을 만나 항상 자녀를 위해 기도하며 믿음의 가정을 세워가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정말 큰 축복을 주신 것 같아 너무 감사해요.”


# 방황 그리고 다시 하나님 품으로

모태신앙을 가지고 태어나 말씀으로 양육 받고 부모님의 기도 속에서 순탄할 것만 같았던 구원장의 삶에도 방황의 시기는 있었다.

“저는 원래 치과대학에 진학할 생각이 없었어요. 특별한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특차로 서울교원대학교에 합격해서 대학생활을 했는데 치과대학에 다니는 오빠가 너무 즐겁게 대학생활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저도 오빠 따라서 치과대학에 들어가게 됐어요.”

오빠의 모습을 보고 따라간 조선대학교 치과대학은 구호산나 원장에게 신앙의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20년 동안 부모님이랑 서울에서 함께 살다가 지방에서 혼자 생활을 하니까 너무 자유로웠어요. 뭘 해야 하나, 뭘 먹어야 하나, 그런 것들조차도 고민하지 않을 정도로 자유분방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너무 많은 자유를 누린 나머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됐죠. 그때가 제 인생에선 광야의 시간이었어요.”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만끽하다가 찾아든 나태함들은 결국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을 멀어지게 하고 말았다.

“학교 근처에 부모님과 친분이 있으신 목사님 교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권유도 뿌리치고 다른 교회에 나간다면서 거짓말을 하기도 했어요. 결국 거의 1년을 예배도 드리지 않고 지내게 됐죠.”

구원장 스스로 광야의 시간이라고 한 1년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로 초점을 맞추게 하는 깨달음의 시간이 됐고 삶의 목표를 찾는 원동력이 됐다.

“배타적인 기독교 문화에 거부감이 들어서 천주교도 가보고 불교도 가봤어요. 그런데 결국 그곳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대학에서의 모든 삶이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됐죠. 이후에 한 찬양집회에서 하나님과 멀리 있을 때 느끼지 못했던 은혜를 체험했고 이틀 동안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어요.”


# 낮은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

순탄하기만 했던 삶이 연단의 시기를 지나 더 큰 깨달음을 가지고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기까지, 또 계획하심을 따르며 헌신하기까지 방황하며 느끼지 못했던 기쁨들이 삶 가운데 채워지고 있다고 구원장은 고백했다.

“제가 만약 그런 시절을 겪지 않았더라면 겸손함도 몰랐을 것이고 다른 관점으로 많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없었을 거에요. 치과 이름을 지을 때도 종교색이 짙어서 우려하는 분들도 계셨지만 하나님의 계획이시고 하나님의 소유라고 생각하니까 망설일 이유가 없었어요.”

치과의사로 또 교회 반주자로, 의료선교사로, 후원자로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모든 일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은 입으로만 하는 고백이 아닌 실천으로 이어졌다.

“개원 후에는 예배와 섬기는 일에 더 집중하고 싶어서 대예배 반주는 반드시 제가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치과 세미나는 보통 주일에 많이 열리는데 그것도 거의 참석을 못하고 있죠. 그래도 기뻐요. 하나님께로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에요.”

부부가 모두 치과의사인 오빠네 가족과 함께 필리핀으로 의료선교를 다니고, 국내에서는 학교와 단체, 목회자들을 후원하며 자신이 나눌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나누는데 힘쓰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는 것.

“특히 목사님들께는 치과에 좀 자주 오시라고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를 악물고 기도를 많이 하셔서 그런지 목사님들은 대부분 치아 상태가 많이 나쁘세요. 대형교회 목사님들은 교회에 섬기는 성도들이 많이 계셔서 괜찮겠지만 작은 교회 목사님들은 치아관리를 잘 못하시더라고요. 목사님들께는 특별히 재료비 정도만 받고 치료를 해드리니까 제발 미리 오셔서 예방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섬기는 치과, 마음을 치유하는 치과, 함께 나누는 치과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구호산나 원장은 낮은 자를 높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다.

“낮은 저를 원장의 자리에 세우신 이유는 사랑하고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작지만 5명의 직원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섬기는 병원을 보며 ‘호산나치과가 자랑하는 하나님을 나도 믿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살아가다보면 비전을 함께 나눌 배우자도 찾게 되지 않을까요?”

자신이 받은 많은 축복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길 원하는 구호산나원장.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예배자로 선교사로 치과의사로 헌신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통해 더 많은 일들을 이루어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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