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된 교회의 동일한 신앙고백은 연합 가능성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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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교회의 동일한 신앙고백은 연합 가능성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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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8.2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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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고신대학교>


일제하에서의 장로교 총회의 해산은 타의에 의한 강압의 결과였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한국에서의 장로교회는 1912년 총회의 조직 이후 1952년 8월까지 40년간 단일 총회로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50년대 한국의 장로교회는 3차례의 분열을 통해 고신, 합동, 통합, 기장 등 4교단으로 분리되었고, 이 분열이 오늘의 한국장로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그 이후, 특히 1970년대를 거쳐 가면서 수다한 분열을 거듭하여 현재 한국장로교회는 약 100여개가 넘는 교단으로 분리되었고, 그리스도의 몸은 상처 입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서 서 있다.

1950년대 장로교회의 3차례의 분열로부터 약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와서 이 분열의 배경과 과정, 역사, 그리고 신학적 타당성을 검토해 보는 일은 필요한 일인 동시에 우리에게 반성과 성찰의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역사적 검토와 함께 앞으로의 일치 혹은 연합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의 배경에는 해방 후 교회쇄신의 문제, 교권의 장악, 그리고 신학의 문제로 대별될 수 있지만, 보다 중요한 요인은 해방 후 교회 쇄신문제와 관련하여 쇄신론자들과 현실 타협적 지도자들 간의 대립이 가져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신학적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분열의 주효한 요인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195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은 이미 일제하에서 배태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하의 신사참배 강요와 해방 후 이에 대한 회개와 권징의 문제는 고신교단 형성의 배경이었고, 김길창 중심의 친일전력의 교권주의자들은 교회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다시 말하면 1950년대 초 장로교회의 분열에는 신학적 요인이 없지 않았으나, 일제하에서 부일협력자들이 해방 이후에도 신속한 변신을 통해 교권을 행사하고, 치리회를 장악하려는 교권주의가 교회 분열을 가져온 지배적인 요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해방 후 친일세력을 제거하지 못한 것이 민족정기를 바로 잡지 못했듯이, 해방 후 친일적 인사들의 교권의 행사는 신앙적 정의를 확립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 분열의 요인이 된 것이다.

이만열 교수는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분열될 수밖에 없는 소지를 안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교파단위적인 선교나 선교지 분할정책이 한국교회 분열의 원인(遠因)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 분열의 보다 근원적인 요인은 우리 안에 내제한 내적 요인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도권 확보, 파벌의식, 당파성, 지연, 혹은 학연 등 비신학적 요인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

195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에는 나름대로의 이유와 명분이 없지 않았으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연합을 파괴해야 할 불가피한 분열이었던가에 대해서는 반성의 여지가 없지 않다.

1950년대 분열된 한국의 4대 장로교회와 그 이후의 분열된 교회 중에서 기독교장로회를 제외한 절대다수의 장로교회가 장로교 정치제도와 함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WCF)를 교리표준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비록 교회는 분리되어 있지만 동일한 신앙고백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은 신앙고백이 신학과 신앙, 교회적 삶, 목회활동 등 전 영역에 대한 규범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간의 일치나 연합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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