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두동 일대를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전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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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두동 일대를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전도했어요”
  • 현승미
  • 승인 2007.10.1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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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구역장’에서 전도왕 된 반찬 전도사 문 형 순 권사


“7년여 만에 2000명을 전도했어요. 그때 제가 속해 있는 교단에서 전도왕으로 선정되기도 했지요. 그 뒤로 많은 곳에 간증집회를 다니게 됐는데, 한 동안은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곳에 간증을 다녔어요.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매 주 단 한명이라도 꼭 전도를 합니다. 전도하지 않고서 어떻게 간증집회에서 전도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요.”


전도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간증꾼에 불과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다며 복음전도의 사명을 이야기 하는 문형순권사(한소망교회).


신앙생활을 시작한지는 20여년정도 됐다. 전도에 본격적인 소망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5년도 일산신도시로 이사하게 되면서부터다. 그때 인연을 맺은 곳이 한소망교회.


“이사를 앞두고 3, 4년 전부터 신령한 목사님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었죠. 더불어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출석하게 되는 것도 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당시 한소망교회는 상가 6층에 세 들어있는 개척교회였지요.”


담임목사는 대뜸 문권사에게 구역장을 맡겼다. 그런데 구역원이 한 명도 없는 ‘나 홀로 구역장’이었다. 직접 전도해서 구역원을 만드는 것, 그것이 한소망교회에서 그에게 주어진 첫 사명이었다.  


“목동에서 교회 다닐 때도 구역장을 맡았어요. 구역원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제목을 놓고 항상 기도하고 정말 열심히 구역장 활동을 했어요.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열심히 기도생활하고 교회봉사도 했지요.”


처음엔 혼자 구역예배 드리며, 여유로운 기도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점점 하나님이 그를 떠나실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거라는 생각에 구역식구에 대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20층 아파트 꼭대기 층부터 하나하나 벨을 누르며 전도를 하기로 결심했다.


“노방전도는 많이 해봤지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전도를 해보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쉬울 리 없지요. 몇 차례 거절당하고 나서는 두려움이 한가득 자리하게 됐어요.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머리카락도 세시는 하나님이시잖아요. 몇날 며칠 전도하는 모습 하나님께서 보셨겠지요. 꼭 구역식구를 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다시 전도를 시작했어요.”


이번 지혜를 구했다. 동네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오가는 곳, 집 근처 대형마트가 떠올랐다. 오전시간 금식하며 기도한 후 집 근처 대형마트를 찾은 그는 아기를 업고 있는 어린 새댁을 만나 구역식구가 되자며 손을 붙잡았다.


“어린 새댁은 언젠가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아직은 아이가 어려서 할 수가 없다며 아이가 크면 신앙생활을 하겠다더군요. 그때 내 첫 구역원은 이 사람이다 싶었지요. 마침 바로 앞 동에 살고 있었어요.”

 
그때부터 문권사는 새댁에게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부담스럽지 않지만, 상대방에게 꼭 필요한 것. 당시 음식에는 자신 있었던 그는 장 볼 때마나 콩나물 500원어치, 시금치 한 단을 더 사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새댁이라 매 끼니때마다 반찬 걱정이 될 것 같아서요. 내가 손이 커서 반찬을 너무 많이 했다고, 나눠먹자며 가져다 줬지요. 그렇게 조금씩 다가갔더니 어느 날 만날 얻어먹기만 해서 미안하다며 구역예배에 참석을 했답니다.”


작은 노력으로 맺어진 결실에 자신감을 얻었다. 아예 반찬 전도를 시작했다. 다음 전도 대상은 당시 초등학교에 다녔던 아들의 친구집이었다.


“엄마는 남대문시장에서 일을 하시고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보살피고 있었지요. 장사하다보면 일요일 날 파김치가 돼서 오니까 두부조림하고 묵을 만들어서 인사를 갔어요. 그 뒤로 손이 크다 보니까 반찬이 자꾸 남는다며 저녁 반찬 2~3가지를 만들어서 방문했지요.” 


그렇게 문권사가 구역식구를 늘려가는 동안 교회도 부흥하기 시작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새로운 교회터전이 필요했다. 다행히 집에서 세 정거장 거리에 교회 부지가 마련됐다.


“너무 놀랐어요. 신령한 목사님 보내주시고, 가까운 거리에 교회까지 세워주시며 제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지요. 그리고 그때부턴 매일 맨 땅에 대고 기도했어요. 마두동 일대를 싹쓸이해서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겠다고 말이예요.”


집에서 부지까지 버스로 세 정거장정도. 매일 아침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그 거리를 뛰어가서 맨 바닥에 엎드려 기도했다.


허허벌판에 엎드려 기도하는 그를 이상한 사람처럼 구경하던 이들도 있었다. 아직은 몇 들어서지 않은 상가에서 일하는 이들이었다. 마두동 일대를 싹쓸이하겠다던 그의 바람처럼 그들 구경꾼 모두가 문권사의 구역식구가 됐다.


하나님의 기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문형순권사의 가족에게까지 역사하셨다. 그의 10년 기도로 남편이 회심하고 믿음의 동역자가 됐다. 전도하기 위해 자주 집을 비우고, 주일이면 교회 봉사 때문에 얼굴조차 보기 힘든 엄마의 사랑에 목말라 하는 사춘기 아들에게도 하나님은 어김없이 찾아오셨다.


“인문계 공부를 하던 아들이 갑자기 고2때 미술을 전공하겠다고 하는거예요. 남들은 어렸을 때부터 준비를 해도 쉽지 않다는데 입시를 일 년 앞두고 그것도 미술을 하겠다니 그게 어디 가능하겠어요.”

 
아들의 완강한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당시 대학입시에는 4번의 기회에 주어졌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모두 붙지 못했다. 게다가 마지막 대학은 미술학과로는 알아주는 홍익대학교였다. 앞서 세 곳보다 더 들어가기 더 어려운 곳이었기에, 모두들 포기하고 있었다.


“아들이 엄마가 예수 믿어서 된 일이 뭐가 있냐고 죽고 싶다며 절 원망했어요. 하나님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 천국 보내놓고 내 아들은 지옥 보내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지요.”


기적이 일어났다. 합격여부를 대신 확인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합격이었다. 수능고사는 최하점수를 받았지만, 실기고사에서 최고점수를 받은 것이다. 다행히 실기고사에서 가장 자신 있어하는 부르터스 조각이 주어졌던 것이다.


“아들이 그러더군요. 혹시 본인 실력으로 됐다고 할까봐 모두 떨어뜨리고 마지막에 합격시켜주셨다고요. 가족 모두가 거실에 무릎 꿇고 앉아서 감사 기도드렸지요.” 


약속한대로 마두동 일대를 돌며 끊임없이 전도했다. 너무 많아 나중에는 자신만 알아볼 수 있도록 문 앞에 조그맣게 표시를 해 두는 방법을 썼다.


그것이 화근이 돼 도둑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그런 문권사의 열정적인 모습에서 은혜받은 많은 이들이 그의 뒤를 이어 전도활동을 하고 있다.


이제는 셀 조직을 구성해 그가 전도한 이들 중 12명의 목자를 세우고, 또 그들이 각각 12명의 목자를 세우며 전도특공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올 때까지 하나님이 주신 전도사명을 굳건히 해나가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문형순권사에게서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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