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에큐메니칼순례 동행취재기-중]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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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에큐메니칼순례 동행취재기-중]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하나'였다
  • 이현주
  • 승인 2007.01.05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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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개혁도시도 복음의 쇠퇴 고통...로마향한 순례단 베네딕토교황 만나
▲ 칼빈의 개혁교회.
 

종교개혁은 스위스에 많은 선물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스위스사람들의 근면하고 성실한 삶은 유럽사회에서도 모범이 되고 있다. 사치와 향락을 절제할 줄 아는 도시 제네바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로 손꼽힐만큼 유명한 곳이다. 재미난 것은 시계로 유명한 스위스의 명성 뒤에 종교개혁이 있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종교개혁당시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한 사람들 가운데 시계 기술자가 많았다는 것. 그들이 지금 스위스의 시계산업을 이끌어가는 뿌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제네바는 종교개혁의 성지답게 수많은 역사를 품고 살아왔다.


존 칼빈처럼...끊임없이 개혁하라


신정정치를 통해 거룩한 도시로 만들겠다며 종교개혁의 칼날을 세웠던 존 칼빈. 제네바로 망명한 칼빈은 파렐 등 다른 개혁자들과 제네바를 점령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교회, 그리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칼빈의 개혁은 세계교회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제네바를 떠나기 전 칼빈의 흔적을 찾아나선 에큐메니칼순례단은 구시가지 언덕에 자리한 피에르성당을 방문했다. 신구교간 전쟁으로 주인이 수차례 바뀌기도 한 역사의 현장에는 훼손된 흔적이 역력했다. 단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창을 제외하고는 화려함을 찾아볼 수 없을만큼 이곳은 개혁당시의 금욕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현재 개신교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피에르성당은 성탄을 앞두고 열리는 지역 음악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교회 중앙에는 칼빈이 설교했다는 단상이 세워져 있었다. 피에르성당을 나와 제네바 대학 안 바스티옹 공원을 지나치자 10미터 높이의 벽면 부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종교개혁기념비로 불리는 이 부조물에는 파렐, 칼빈, 베즈, 녹스 등 종교개혁의 핵심인물들이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네바에서 칼빈의 흔적을 둘러보는 동안 ‘타락한 권위에 맞서 싸운 칼빈이었지만 그 역시 신성한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또 그의 개혁정신을 이어오는 칼빈주의 교회들 역시 오늘날 얼마나 많이 타락했는가’라는 생각에 이르자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개혁의 나라 스위스 역시 전체 인구 가운데 기독교 인구는 33%. 그토록 개혁하고자 했던 로마 가톨릭의 인구는 아직 42%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힘겹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다른 유럽 나라와 마찬가지로 무종교와 무슬림의 증가가 눈에 띠게 늘어나는 상황이어서 교회의 위기를 실감케 했다.

결국 개혁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말씀 안에 두려는 노력으로 가능하다는 단순한 진리를 거듭 확인한 에큐메니칼순례단은 제네바에 머문 이틀 동안 개혁교회가 주는 수많은 메시지를 확인한 채 이탈리아 로마로 초대교회의 숨결을 찾아 떠났다.


▲ 성 프란체스코를 기리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성당. 청빈의 사도를 기념하는 교회는 웅장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영원히 남았다.
성자 `프란체스코`의 흔적을 따라 아시시로


12월 12일, 로마 바티칸시티에 도착한 순례단은 당초 관광일정을 뒤로한 채 성 프란체스코의 성지 아시시를 방문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체스코. 우리에게 평화의 사도로 잘 알려진 그가 천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도록 존경받는 이유는 ‘청빈’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도중에 하나님을 만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나섰던 프란체스코는 우리에게 ‘완전한 기쁨’이라는 과제를 남기고 떠났다.


평화롭게 보이는 도시 아시시의 언덕배기에 위치한 성 프란체스코 성당. 그 곳에는 프란체스코 성자의 찢겨진 누더기 의복과 그가 남긴 메시지, 그의 행적을 읽을 수 있는 벽화 등이 남아 있었다.

5킬로 정도 떨어진 아시시 외곽, 천사들의 성마리아성당에는 프란체스코가 처음 형제회를 시작할 때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기거했던 돌집이 보존되어 있었다. 다리조차 펼 수 없는 작은 한 칸의 방에서 프란체스코는 행복했다.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고 형제들과 토론할 수 있었고 이슬을 피해 작은 몸을 누일 수 안식처가 있었으니 말이다.


평생 청빈을 목숨처럼 여기며 살았던 프란체스코와는 달리 아시시의 붉은 돌로 세어진 성당 중세시대 성이라고 착각할 만큼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순례에 참여한 가톨릭 광주교구장 김희중주교는 “청빈의 프란체스코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기념하는 교회를 세우고 자료를 보존해 후세에 길이길이 남기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선교”라고 설명했다.

정말 다행인 것은 아시시에서 만난 프란체스코 사도는 순례단 일행들에게 많은 여운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친구들에게 베푸시는 성령의 온갖 은총과 선물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것은 바로 자기를 눌러 이기고 고통과 모욕, 수치, 불쾌한 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달게 참아 받는 그것입니다”라고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기쁨’을 강조했던 프란체스코 사도. 오늘날 ‘축복’만을 이야기하는 교회의 모습 속에서 과연 하나님이 주시는 ‘완전한 기쁨’이 남아 있기는 한 것인지 되새기기에 충분했다.

교황과 한국교회의 `첫 만남`


아시시를 방문한 다음날, 순례단은 교황 베네딕토16세를 만나기 위해 바오로 6세홀로 향했다. 매주 수요일은 일반순례객들이 교황을 만날 수 있는 날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순례객으로 바오로 6세홀은 가득찼다. 5천여명은 ‘베네딕토’를 외치며 저마다 준비한 찬양을 연습했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부터, 새 생명을 얻은 아기, 병들어 구원과 치유를 갈급하는 병자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교황의 은총을 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 한국교회순례단은 교황 베네딕토16세를 만나, 선물을 전달하고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기도를 요청했다.


11시. 교황이 들어서자 접견장은 환호와 박수로 떠나갈 듯 했다. 마치 인기스타의 팬미팅현장을 방불케 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그의 손을 만지기 위해 손을 내미는 성도들 속에서 교황의 인기와 권위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무대에 자리한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사도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언어권역별로 방문객들의 이름이 불렸다. 영어권에서 가장 처음으로 한국에서 방문한 에큐메니칼순례단이 호명됐다. 교황은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며 순례단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순례단 역시 교황에게 준비한 도자기를 선물로 증정하며 한국교회의 일치노력과 이에 대한 관심을 요청했다.


교황방문은 한국교회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교회협 일치위원장 김광준신부는 “가톨릭의 상징인 교황을 만나는 것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첫 걸음”이라고 말했다. 이번 순례가 하나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인 만큼 이웃종교의 제도와 역사, 성직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며 교황 방문 역시 매우 의미있는 경험이었다고 소개했다.

가톨릭 성도들에게 교황은 신과 같이 높은 권위를 가진다고 한다. 실제로 로마 곳곳에 세워진 성당 벽화에서 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수많은 그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심점없이 방황하는 개신교의 모습을 볼 때 정신적 지도자가 한 명쯤 우리의 길을 인도하는 것은 어떨까 부러운 마음도 생겨났다.


하지만 부러움도 잠시, 우리의 믿음 가장 높은 곳에는 한분의 하나님만 계셔야 하며 우리는  주님 안에서 ‘완전한 기쁨’을 얻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가 떠올랐다. 신-구교 간 일치를 찾는 순례의 여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똑같은 사명’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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