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초고속 예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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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초고속 예찬시대
  • 윤영호
  • 승인 2006.08.16 15: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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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성장... 속도를 숭배하는 시대
 

스피드는 행복의 척도인가  

현대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무엇이든 빠르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대형할인마트에 가면 넘쳐나는 물건들을 연중 세일하느라 북새통이며 각종 매체에서도 좋고 값싼 물건을 홍보하느라 광고가 넘쳐날 정도다. 사실 교회에 다니는 우리들도 세상과 호흡을 함께하며 그들의 행동반경에 궤를 맞추며 살고 있지 않은가. 좋고 값싼 물건을 구입하느라 떼로 몰려다니는 틈 새 속에서 항상 ‘나’를 발견하게 된다. 교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구분없이 그저 세상의 빠름과 느림이라는 속도에 따라 모두가 맞추며 살고 있는 것이다.

급격한 시대변화는 삶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 놓기도 하고 심지어 우리들의 사고방식도 바꿔 놓는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같은 ‘스피드문화’에 컨트럴(조종) 받으며 교회의 예배와 각종 예전적인 방식까지 흩어놓거나 새 질서에 맞는 것으로 교체되기 일쑤다. “복음이라는 본질만 바뀌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낙관론자들은, 하지만 어른 앞에서 다리 꼬고 앉는 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예의가 없다”고 야단이다. 어른존중이라는 본질은 그대로인데도 예절이라는 형식을 갖추지 않은 것을 꼬집곤 한다. 본질을 드러내는 형식도 중요한 부분임이 분명하다. /


정보통신의 발달은 온 세계의 사건사고들을 매우 빠른 시간 안에 접하도록 함으로써 지구문명의 비약을 재촉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빠른 사람의 이동은 물론 문화이동과 물자이동을 가져와 지구를 하나의 마을로 묶는 기폭제역할을 한다고 한다. 빠르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인정받지 못하는 세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강국으로서 세계2위인 우리나라의 경우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름’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전국이 하나의 인터넷망으로 구축된 국가는 전무하다고 하며 특히 휴대폰에 의한 문자서비스는 세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왕성한 커뮤니케이션을 자랑한다고 한다. 모든 것은 빨리 이루어져야 하고 미적거릴 경우에는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이제 ‘빠름’은 사회규범으로 자리 잡는 추세여서 이 속도에 적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규범을 어긴 사람으로 낙인찍혀 그 공동체 안에서 존립자체가 어려워지는 상황을 맞을 가능성이 많다. 어쩌면 국가에 치명적인 해악이 되고 기업과 직장 그리고 특정 조직체의 경쟁력을 약하게 만드는 ‘악함’으로까지 나타날 추세여서 ‘빠름’을 경계하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요즘 청소년과 청년대학생들을 생각해 보자. 인터넷을 연결하고자 할 때 조금이라도 느리면 얼마나 분개하며 짜증을 내고 있는지 말이다. 대화하는 친구들 사이에 혹시 이해가 느린 친구가 있다면 그를 가리켜 “버퍼링이 느리구나”라고 무안을 주기까지 한다니 ‘빠름’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이제는 ‘숭배’차원으로 비약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해를 못하는 것은 버퍼링이 느려서 그래”

물론 빠른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신속성이 문명의 중요한 기술적 측면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다. 최근 태풍피해로 전국이 소란하다. 물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만약 신속함이 없다면 불행에 직면한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광케이블로 짜여진 전국 네트워크는 빠른 연락망을 통해 위기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출 수 있을 것이다. 911시스템을 포함해서 재난구호 네트워크 같은 ‘생명살리기’는 신속함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않되는 분야이다.


신속함은 효율성을 필요로 한다. 신속함을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는 요소들을 철저히 가려내는 것은 효율성의 극대화를 위한 작업들이다. 고속철도나 도로를 건설할 때 산을 우회하기보다 터널을 뚫는 것은 바로 효율성 때문이다. 패스트 푸드점이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도 신속함과 효율성이다. 미국의 유명한 사회학자이자 미래학자인 조지 리처박사는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점의 특성을 효율성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 통제 4개로 나누고 있다. 주문한 햄버거 단 하나를 통해 제품의 크기와 서비스, 가격 등을 미리 계산가능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사실 신속성과 효율성은 제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에서 처음으로 시작됐다. 19세기 말쯤 작업의 능률을 높이려고 시간연구와 동작연구를 기초로 노동의 표준량을 정한 테일러시스템(테일러주의)이 도입된 이래 모든 기업은 노동을 양(量)으로 측정 가능하게 돼 ‘노동한 만큼의 임금’을 책정하도록 기준이 제시됐다.

이어 또 나온 것이 포드주의인데 이른바 컨베이어시스템은 포드주의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이로부터 사람의 노동량은 컨베이어벨트의 속도에 따라 정해지게 됐으며 점차 노동과 인간소외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동양적인 속도와 효율성을 내세운 ‘토요디즘’이 최근에 제시돼 주목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속도경쟁과 효율성 문제가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최우선 가치척도로 이어지면서 현재 우리나라는 ‘판매의 다국화’와 ‘세계화’라는 특별하게 짜여진 시장경제 앞에 무방비로 서 있는 것 같다.


시스템에  조종당하는 인간사회의 무상함

빠름과 느림이라는 두 단어 가운데 우리나라에 익숙한 것은 단연 ‘빠름’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서 무조건 성장해야 했고 100억 달러 수출의 위업을 달성해야 했던 개발정책을 지나면서 우리나라는 세계 일등기업 창출을 위해 ‘정부-기업’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성장시기를 앞당겨왔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기업의 순위가 바뀌는 것도 알고 보면 개발정책이 낳은 산물이다.


이런 가운데 빌리그레이험 목사가 부흥집회를 주도하며 한국교회 역시 빠른 성장을 만끽했다. 대다수를 이룬 천막을 걷어내고 시멘트와 벽돌로 올린 새 성전이 여기저기 건축되는가 싶더니 요즘에는 대리석으로 짓는 교회당이 부지기수다. 성장됐음을 보여주는 결과물이 ‘대단한 건축’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속도경쟁이 신앙인들의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까지 그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이 ‘속도경쟁’ ‘빠름’을 주제로 잡은 것은 기업상품 개발과 관리 그리고 효율경영을 위해 도입되고 있는 각종 시스템들이 빠름과 효율성을 숭배하고 있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에 의해 신앙관리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하드웨어 성장과 신앙양육프로그램이라는 소프트웨어의 발달이 곧바로 신앙인 개인의 심성과 인격, 가치관을 관리하고 갱신하는 시스템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게된다. 1년 6개월~2년 기간동안 이루어지는 제자훈련을 마치면 리더교육을 받게 되어 멘토링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맞춤신앙’이 나타나게 된다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훈련교재와 책자가 인도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리더자와 닮은 리더자 양성을 반복한다는 얘기다. 훈련 기간이 1~2년인 것도 길다며 ‘6개월 시스템’을 개발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빠른 시간 안에 훈련된 평신도를 사역자로 헌신하게 한다는 주장이다. 짧은 훈련기간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성장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최근 ‘빠름’에 저항하는 소리도 눈에 띤다.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든지 밀란 쿤데라의 ‘느림’, 버트란트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 일각에서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다. 성공을 향한 인간의 속도경쟁을 제어해야 마땅할 교회가 이것을 미덕으로 추켜세우는 일이 반성되지 않는 한 교회성장과 신앙양육은 ‘빠름에 대한 숭배’의 다른 한 측면으로 우리들을 점차 옥조일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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