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2]21세기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해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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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21세기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해체주의
  • 윤영호
  • 승인 2006.03.2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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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체주의는 과거의 명백한 사실기록을 현대관점으로 재조명한다며 사실자체를 해석된 의미로 왜곡하곤 한다. 기독교 역사의 엄연한 진리를 재해석해 기독교역사의 해체가 우려된다.

 글 싣는 순서
2.자연주의    3.실용주의    4.유토피아


역사재해석이란 명분으로 `역사적 사실 왜곡` 일상화

난도질당한 기독교세계관. ① 해체주의 


인류역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화합을 이루기도 하고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며 살육의 참담한 비극을 겪기도 했다. 이 가운데 무엇이 옳은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시대 속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했던 계층이 누구였느냐에 따라 ‘옳은 세계관’으로 인정된 것이 지난 역사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 적용되는 세계관도 달라졌다는 얘기다. 여기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타락한 인간의 구속을 인정하는 기독교세계관이 엄청난 침해를 받으며 교회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세상의 세계관에 의해 침식당해왔다는 점이다. / 편집자 주


무려 15년 전에 행해진 설문조사지만 특별히 주목할 만한 집계가 있다. 기독교 관련 내용만을 주로 설문하는 조지바나(George Barna Institute)가 지난 91년 ‘미국인들은 무엇을 믿는가’(What Americans Believe?)라는 제목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한 67%가 “불변의 진리는 있을 수 없다”는데 지목했다.


또 이듬해인 92년 갤럽조사에서 미국인들에게 “도덕적으로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옳고 그름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에 동의하느냐고 물었을 때 69%가 동의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이 응답자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은 인정하고 따를 것이라고 말해 하나님의 가르침이 삶의 절대적인 기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상당한 혼돈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많은 나라 가운데 유독 미국, 미국인에 대한 설문 집계 결과에 주목하는 것은 미국이 우리나라에 끼치는 지대한 영향력 때문이다. 이미 15년 전 발표된 집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고 있는 미국의 경우 ‘절대기준’을 상당부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최근 매체에서 나왔던 광고카피를 기억한다. “떠나라,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을 한 만큼 쉬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절대성이 배제되고 상대주의 사상이 충만한 관점에서는 “지금 쉬지 않으면 언제 쉴지 모른다. 그러니 바로 지금 쉴 때라는 생각을 할 때 쉬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현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어필한 것이다. 

사회에서 지친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멋진 자동차 한 대 빼서 그리고 이용한도가 많은 신용카드를 갖고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다음의 또 다른 예. 미국의 맥주광고 카피 한도막이다. “지금 이 순간은 단지 한 번뿐, 가능한 모든 것을 움켜잡아요.” 또 젊은이들의 셔츠에 인쇄된 문구 “Carpe diem”(오늘을 붙잡아라)는 절대성을 잃어버린 상대주의세계에서 인기리에 주목받는 표현들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세속주의의 실존적 표현’이라고 말한다.

언 듯 생각하기에 매력이 있을 만한 이 문구들은 순간적인 만족을 원하는 현대인들의 상처받은 정신세계를 반영한다.

신기한 요리들, 멋진 휴가, 고급 자동차, 명품, 섹스 그리고 성형수술과 중년을 넘긴 사람들이 나이 어린 이성을 찾는 경향 등은 바로 절대성을 상실하고 상대주의와 세속주의에 찌들어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요약해 주는 단어들이다.

위의 예가 과연 우리나라 사회와 무관한 미국만의 문제인지 하나씩 뜯어보자. 21세기에 들어서 부쩍 늘어나는 우리사회의 현상들은 아닌가. 어느새 우리사회는 이렇게 상대주의와 세속주의에 점령당하고 만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 역시 이 단어들 사이에서 크나큰 혼돈을 겪는 것으로 보여 적지 않게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우리는 절대성을 상실한 현대의 상대주의 경향을 단순히 도덕의 범주로만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미국 복음주의권이 시작한 ‘도덕적 다수운동’은 이 오류를 증명하는 좋은 사례이다.

왜 오류인지는 다음의 몇 가지 예를 통해 증명될 것이다.

첫째, 미국 아카데미상을 석권한 바 있는 ‘늑대와 춤을’(캐빈 코스트너 주연)을 보자. 기독교영화는 아니지만 미국인을 포악한 점령자로, 원주민인 인디언을 순진무구한 피해자로 그린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영화 마지막 부분에 코스트너가 인디언에게 백인이 더 많이 몰려올 것이라는 나쁜 소식을 전해주면서 그 수(數)를 표현하기를 ‘하늘의 별’만큼이라며 손가락을 하늘로 가리킨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아브라함의 후예를 ‘하늘의 별’로 표현한 성경의 상징을 그대로 베낀 것인데 그 후예들이 곧 백인으로서 인디언이 사는 땅을 점령한다는 도식을 상상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다룬 인디언 ‘수우족’은 영화에서처럼 순진하지 않았다는 것이 학자들의 말이다. 그들은 가장 호전적인 족속으로 대량학살의 대표적인 부족이었다.

다음으로,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문제가 된 ‘다빈치코드’와 그 전에 문제가 됐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살펴보자.

책을 영화화한 ‘다빈치코드’는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그림을 놓고 예수그리스도 우측에 있는 사람이 제자가 아니라 ‘한 여인’일지도 모른다는 것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예수님이 결혼을 했으며 심지어 자녀를 두었다는 가정을 둔 영화이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도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내용상 비슷하다. 스스로 구세주인지 아닌지로 늘 고민하던 인간 예수, 결국 십자가 순교를 받아들이며 가룟 유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사명을 수행하지만, 천사를 가장한 악마의 계략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와 평범한 삶을 산다는 내용이다.

영화는 특히 예수님과 바울의 논쟁을 만들어 넣고 “우리에게는 부활한 예수가 필요하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을 못 박아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부활시켜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는 바울의 주장을 적극 반영했다.

‘다빈치 코드’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영화는 기독교를 소재로 한 영화이지만 기독교영화는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독교세계관을 파괴하고 난도질 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담은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명목아래 절대성마저 송두리째 상대화시켜버린 이 영화는 한국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신성모독’차원은 아닌 것이다. 창조와 타락, 구속, 새창조라는 거대한 기독교세계관을 전면 부정하는 파괴적 시도인 것이다.

이처럼 21세기 한국사회는 역사적인 사실과 진실을 자유롭게 변형하는 시도들이 ‘표현의 자유’라는 슬로건 아래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며 안착하고 있어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최단기간 최고흥행기록을 남긴 ‘왕의 남자’ 역시 이런 관점으로 보면 정확하다.

역사적인 사실의 유무에 관계없이 진행되는 영화창작은 사실(史實)에 대한 진위보다 ‘의미’에 비중을 둠으로써 다양한 시도들을 허용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 타래로 얽혀 진행되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21세기로 접어들며 “지금의 순간과 현재를 잡으라”는 슬로건을 중심으로 역사의 왜곡과 의미존중을 집중 조명하는 세속주의와 섞이며 혼합되고 있다.

과거에 있었던 정형화된 모든 것들을 정지하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의미에서 학자들은 최근의 이 경향을 ‘해체주의’라고 집약한다.

해체주의는 성경을 통해 믿음의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물론 대대로 내려오는 믿음의 전통, 한 사회의 공동의 역사들을 깡그리 제거한다. 사회를 하나로 묶는 응집력을 분해할까 매우 걱정스러운 것이다.

특별히 기독교 신앙은 인류와 만물의 역사, 후손들의 구속역사의식을 근거로 한 종교이기에 이를 훼손하고 제거하는 해체주의의 시도들에 매우 민감해야 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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