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적 배타보다 ‘비판적 이해’가 선행돼야
상태바
무조건적 배타보다 ‘비판적 이해’가 선행돼야
  • 운영자
  • 승인 2006.03.16 11: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중문화 속의 동성애 어떻게 볼 것인가?

정혁현목사<영상문화연구소 케노시스 대표>

 

성서에서 동성 간의 성행위를 금지하는 구절을 찾아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동성애를 지지하거나 묵인하는 구절은 절대로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동성애를 금지하고 나아가 동성애자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것은 ‘성서적’이며, ‘기독교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논리적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필연적으로 보이는 결론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동성애에 관한 유명한 성서 구절인 창세기 19장의 내용을 보자. 천사 둘이 소돔성에 있는 롯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타락한 소돔성의 남자들은 롯의 집으로 몰려와 천사들을 이방 남자들이라고 착각하고 그들을 내놓으라며 난동을 부린다. 그들을 겁탈하겠다는 것이었다. 천사들 대신 자신의 딸 둘을 내놓겠다는 롯의 제안에 담긴 태도는 성서적일까?

아내와 자식들, 특히 딸들을 가부장의 소유물로 대하는 내용은 성서에 무수히 많다. 이와 같은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는 성서에서 풍부한 인용구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성서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선뜻 고개를 끄덕거리기 어려울 것이다.

롯의 제안은 그의 죄 없는 딸들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하고 참혹한 폭력이자 냉혹하고 염치없는 부성의 발로였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인용할 수 있는’ 말씀들과 ‘성서적’이라는 개념이 내포하는 의미를 구별할 수 있다면, 기독교인들은 동성애에 대해서도 지금과는 다른 태도를 신앙에 부끄러움 없이, 아니 오히려 더욱 신앙적인 방식으로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국 영화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왕의 남자’나, 올해 아카데미 수상식의 최대 화제작이었던 ‘브로크백 마운틴’이 동성애를 소재로 하여 기독교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두 영화는 모두 동성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목적을 둔 동성애영화는 아니다. 그 보다 두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진정한 소통, 그리고 진정한 사랑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 역시 두 남자의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영화의 주안점은 동성애가 가진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랑의 진정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줄 대상이나 자신에게 모든 영혼을 바치는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가장 깊은 행복을 느끼는 것 아닐까?

오늘날의 인스턴트 사랑은 섹스는 풍요로울지언정 사랑 그 자체가 주는 존재감을 결여하고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관객들이 두 남자의 절절한 사랑에 숨 막힐 정도로 몰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관객은 두 남자의 사랑을 통해 자신이 현실에서 결여한 것을 보상받는다.

기독교는 이와 같이 삶의 진정성에서 오는 행복과 존재감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그러한 메시지의 정수라고 믿는다.

예수의 십자가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문 상징이며, 부활은 이러한 삶이야말로 그 어떤 가치로도 상대화할 수 없다는 믿음의 표상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태도야말로 ‘성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자세야말로 기독교 신앙에서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성서적 메시지 자체를 내던지는 자가당착일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