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Again 1907` -회개와 영적각성이 애국운동으로 승화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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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Again 1907` -회개와 영적각성이 애국운동으로 승화되다
  • 이현주
  • 승인 2006.01.0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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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적 의미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부흥사경회로 확산된 대부흥을 보는 한국교회의 시각은 각기 다르다. 이만열교수는 신비주의 경향이 팽배했던 당시 사건에 대해 “민족의 아픔과 분노를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희석시킨 몰역사적 성격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또 다른 관점으로 평양 대부흥을 보는 견해도 있다. “순수한 신앙과 기독교정신이 한국기독교에 뿌리내릴 수 있었으며 한국교회와 성도의 도덕성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그것이다.

그러나 평양 대부흥 100년을 맞은 지금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의 전기를 마련하고 회개와 영적각성을 통해 교회가 거듭났으며 민족운동의 불씨가 되었다”는데 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부흥운동을 계기로 성도들이 변화되고 교회가 성장하고 사회를 향한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열망이 최고조에 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흥의 결과는 놀라웠다. 1905년 321개였던 교회는 642개로 두 배 이상 늘었고, 세례교인의 수도 9,761명에서 18,964명으로 194.2% 성장했다. 종합적으로 2년 사이 한국교회는 267.84%의 경이적인 증가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가시적인 성과보다 더 큰 소득이 있었으니 바로 성령체험을 통한 자기변화였다. 교회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코자 했던 민족주의자들이나, 재산의 도피처로 사용했던 민종계층, 처음 복음을 받아든 소외된 여자들까지 이들이 동일하게 체험한 것이 바로 성령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었고 죄에 대한 깊은 고백이었다.

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실장은 대부흥사건이 중요성을 갖는 이유에 대해 “성도들의 도덕적 기준이 높아진 것”을 꼽는다.

개인의 내면 깊이 숨겨진 죄를 고백함으로써 신앙심이 정결케 됐으며 한국교회가 지닌 ‘경건성’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몰역사적인 사건이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민족운동의 불씨가 됐다는 보는 견해는 개인의 신앙변화가 곧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일어났다는 점에 기인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국권이 빼앗기는 암울한 역사 속에서 기독교인은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의지했고 교회를 이용하고자 했던 얄팍한 신앙은 회개와 철저한 각성으로 무장됐다.

그 결과 민족의 지표가 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믿음을 굳건히 지키며 1백년 역사를 이어왔다. 3.1운동과 유신독재, 군부통치, 민주화의 열망 속에서 한국교회가 걸어온 길은 일관됐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바뀐 것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며 사회질서 회복에 앞장섰다. 교회는 국난의 어려운 시기마다 하나님을 향해 기도했고 성령운동으로 각성된 교회는 하나님의 개입을 사회 속에서 실현했다. 

영국의 청교도신학자 이안 머레이는 “부흥의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고 성도를 성도답게 하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는 1907년 평양 대부흥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회개와 영적 각성을 통한 변화가 개인구원에 이어 국운을 좌우하는 시대각성과 애국운동으로 이어지며 한국사회를 지켜냈다”는 큰 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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